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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원

4.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12월 29일,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 더보기
3.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4월 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