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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2) 과학기술로 북한읽기 3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2/3) : 1960~90년대중반.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 라는 계간지에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라는 글을 썼습니다. 

간추리긴 했지만 조금은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써서 발표하지 않은 1970-80년대 이야기와 

최근의 북한 경제, 사회의 변화를 부문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썼습니다. 

북한 사회가 더디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빠르게 혁신 친화적인 체제로 변하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3년주기설, 그리고 스핀오프 전략의 실행 등을 이야기만 하고 글로 많이 쓰지 않아 대략의 흐름을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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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2/3) : 1960~90년대중반.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Freie Universität Berlin Institut für Koreastudien, Affiliated Fellow)

 

1962년 : 경제-국방 병진노선 채택. 민수-군수 이원화 경제 시스템 시작. 

1967년 : ‘갑산파 사건(제2 종파사건)’ 과학기술자들의 사상성 의심, 과학기술 정책 후순위회 밀림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는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을 큰 틀에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지원에 더 이상 기대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국방력을 갖추기 위해 ‘경제-국방 병진노선’이 채택된 것이다. 여기서 ‘병진’노선은 단순히 ‘동시에’ 추진한다는 의미로만 읽으면 안 된다. ‘완벽히 분리된’이라는 말을 추가해야 합니다. 즉 군수와 민수 2개의 영역을 완벽히 분리된 형태로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이는 아직 발달이 미흡한 국방 부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1990년대 경제난을 겪던 시기에 위력을 발휘했다. 일반 경제부문에 비해 군수 부문의 피해가 적어 많은 군수 부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40년 가량 보호 육성되었던 군수부문은 2000년대 이후 역으로 민수 경제 발전에 핵심 밑천이자 선도 부문이 되었다. 

무기 개발은 과학기술적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국방과학원(이후 제2 자연과학원)을 1960년대 중반부터 과학원과 별도로 조직하였다. 신규 연구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김책공업종합대학의 그해 졸업생 전원을 국방과학원에 배속시키기도 했다. 당시까지 다른 부문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져 있던 기계공업은 국방 부문 강화 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발달하여 1970년대부터는 첨단 기계제품이라 할 수 있는 미사일을 역설계 방식으로 개발/개량하였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만톤 규모의 대형 원양어선을 만들게 된 것도 국방 부문에서 발달한 기계공업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한정된 자원으로 민수/군수 양쪽 모두를 발전시키려 했기에 상대적으로 민수 부문은 지원이 줄어드는 상황이 되었다. 우수한 인력은 물론, 각종 자원까지 국방 부문에 우선적으로 제공되었기에 민수 부문의 지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초까지는 중앙의 지원을 바탕으로 민수 부문의 발전 전략이 수립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는 자체적으로 부족한 부문들을 해결하면서 발전 전략을 수행하라는 요구가 많아졌다. 오늘날 한쪽에서는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ICBM, SLBM을 자력을 개발하는 발사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삽과 지게 등에 의존하여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양극화 현상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북한 역사 전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의 우선 순위가 뒤로 밀리고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 1967년에 일어났다. 갑산파 사건 혹은 제2의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 1967년에 터진 것이다. 박금철, 리효순이 중심이 되어 2인자를 자처하면서 분파를 만들었으며 당중앙의 결정을 임의로 바꾸었던 일이 폭로되어 많은 이들이 좌천되었고 전체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사상 검열이 강하게 진행되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 주동자 중 세 번째 순위로 거론되었던 사람이 당의 과학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허석선이다. 과학기술자들의 사상을 관리하던 그가 종파사건에 연루되었으니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불신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함흥분원에 현지지도가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을 멀리서 바라보던 김일성 주석이 그들이 소설을 보는지 알 수 없지 않느냐는 식의 말을 했다는 일화는 이 사건 이후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홀대(?)는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인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직접 과학기술 홀대정책이 잘못 되었음을 여러 차례 거론하면서 과학기술 중심의 발전 전략을 여러 방면에서 모색하었다. 오늘날 김정은 위원장에 의해 적극 강조되고 있는 과학기술 중시정책은 1980년대부터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8년 :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정립.

1980년 : 사회주의경제건설 10대전망목표 제시

 

1970년대 접어들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북한 사회의 지난 시기 경험을 일반화, 규범화시키는 일이 진행되었다. 연료, 원료, 인력 그리고 기술의 자립을 핵심으로 하는 ‘주체과학’을 기반으로 ‘자립 경제’ 논리가 갖추어지면서 ‘국방에서 자위’, ‘정치에서 자주’ 그리고 ‘사상에서 주체’라는 논리가 1960년대 중반에 정립화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영도까지 결합되어 198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정리한 ‘주체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으로 변했다. 1960년대 형성되었던 ‘기술혁명’론에 ‘문화, 사상'이 결합되면서 ‘3대혁명론’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195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현장 중심의 기술혁신 모델을 기반으로 ‘과학자, 기술자 돌격대’운동과 ‘3대혁명소조운동’이 전개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1978년에 인민경제의 발전 방향을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로 정리한 것은 10여년 과학기술 홀대 정책의 전환을 의미한다. ‘과학화’를 전면에 내세워 질적 성장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경제 발전 전략을 전환하자는 제안이었다. 김정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전략이 전면에 내세워진 순간이었다. 1980년, 6차 당대회 당시 제시된 ‘사회주의건설 10대 전망목표’는 핵심 분야별로 목표를 단순히 수치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 전망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의욕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수치까지 구체적으로 타산한 경제활동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실리경제, 수자경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88년 11월 :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발전을 위한 결정. CNC기술의 전환.

1995년 : 고성능 공작기계, 4축 CNC 기계(련하기계) 완성.  

 

오늘날 이야기되는 4차산업혁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ICT가 실물 특히 생산현장의 설비들과 결합되는 공장자동화, 지능화라 할 수 있다. ICT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지능을 대신할 수 있는 인공지능까지 개발되어 자동화, 지능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흐름을 4차산업혁명이라고 한 것이다. 기계기술, 그 중에서 기계를 만드는 기계인 공작기계를 ICT와 결합하여 자동화, 지능화한 것을 CNC라고 한다.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 초정밀 기계는 CNC 기술이 확보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ICBM, SLBM 등 최첨단 무기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에서 이러한 발전 방향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88년 11월이었다. 당시 열린 전원회의에서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정책이 채택되었다. 당시 결정 중에는 1982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여 1986년 완성한 ‘구성-105호’의 분공장을 구성기계공장이 포함된 ‘4월3일공장’에 만들어 계열생산(시제품 생산)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CNC의 전단계인 NC공작기계였던 ‘구성-105호’ 분공장은 아쉽게도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구성-105호’개발 공장에서는 중앙의 지원없이 이를 토대로 북한의 첫 CNC공작기계인 ‘구성-10호 만능선반(4축)’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95년 현지지도하던 김정일 위원장이 현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이 기계를 알아보고 ‘련하기계’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 기술을 더욱 발전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2009년에는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한 ‘5축동시조종 수력타빈날개가공반’까지 개발되어 2009년 8월부터 시작된 ‘첨단돌파전략’의 물리적 근거가 되었다. 1998년 첫 인공위성 발사체인 ‘은하 1호’는 CNC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제작될 수 없는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북한경제 체질 개선 프로젝트, 즉 과학기술을 통한 기술혁신 체제 도입은 자동화된 정밀 기계기술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추진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 개발했던 각종 정책과 기술들은 1990년대 경제난을 이겨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고, 1998년 고난의 행군이 끝난 이후 다시 전면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부터 쓰이기 시작하던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라는 지향은 1998년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요즈음에는 한발 더 나아가, ‘교육과 과학연구 그리고 생산의 일체화'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아마도 1988년에서 1998년은 북한 역사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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