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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6.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황해제철소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황해제철소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Freie Universität Berlin Institut für Koreastudien, Affiliated Fellow)


황해제철소는 일제 시기인 1914년에 미쓰비시 재벌에 의해 설립된 겸이포제철소를 전신으로 하여 세워졌다. 대동강을 끼고 설립된 황해제철소는 동해에 세워진 김책제철소와 더불어 북의 대표적인 제철소이다. 북이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대부분의 생산 설비가 그렇듯, 황해제철소도 해방 직후에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다가 1948년 즈음이 되어야 재가동되기 시작하였고 1950년 전쟁이 터지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어 다시 가동이 중단되었다. 1953년부터 진행된 전후복구사업의 최우선과제로 제철소 복구사업이 채택되어 일부 직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다가 19584월에야 비로소 황해제철소의 1호 용광로와 해탄로가 복구되어 정상가동되었다.


1956년에 복구된 강선제강소와 달리 황해제철소는 자체의 힘으로 복구되었다고 선전되었다. 자재나 설비, 기술, 인력 등을 외국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1957년부터 시작된 15개년계획 수립과정에서 자립과 관련한 내용에서 나라 안팎으로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황해제철소를 자체의 힘으로 복구하였다는 점은 정책의 정당성을 넘어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대대적인 선전 포인트가 되었다.


195851일이 목표로 설정되었던 1호 용광로 해탄로복구사업은 마감 하루를 앞둔 430일날 겨우 끝났다. 당시 열린 조업식에 참석한 김일성은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격정적인 연설을 시작하였다.


 

“5.1절 전야에 우리나라 흑색금속공업발전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는 황해제철소 제1호 용광로와 해탄로의 조업식을 하게 되는 것은 특별히 의의 깊은 일이며 이것은 우리들의 기쁨을 더한층 크게 하여줍니다. 새로 건설된 용광로와 해탄로는 당신들이 우리 로동계급과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황해제철소는 다른 중공업기업소들과 마찬가지로 적들의 야만적인 폭격에 의하여 혹심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정전 후 당과 정부는 공업부문들의 균형적 발전을 고려하여 이 제철소를 계단별로 건설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압연강재에 대한 인민경제의 긴급한 수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제강직장과 조강직장을 복구하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이와 같은 큰 용광로와 해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오늘 조업하게 되는 용광로는 선철을 1년에 25만톤 생산하며, 해탄로는 콕스를 1년에 30만톤 생산할 수 있는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설비로써 이전보다 2배 이상의 생산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철소의 복구건설은 실로 방대하고도 어려운 공사였습니다. 용광로와 해탄로 건설을 위하여 1만 톤 이상의 철근골조를 만들어 조립하였고 28km나 되는 철길을 새로 놓았으며 600대 이상의 각종 기계설비들을 조립하였습니다. 용광로와 해탄로 건설에 필요한 방대한 기자재를 공급하며 우리가 아직 당해보지 못한 복잡한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겹쌓이는 난관들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은 우리의 로동계급이 애국적 열성과 무궁무진한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이 어려운 공사를 기한 전에 능히 완성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영웅적 위훈으로써 당의 기대에 훌륭히 보답하였습니다.


용광로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로력영웅들과 로력혁신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전체 로동자들의 앞장에 서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작업을 담당 수행하였으며 당과 조국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을 발휘하여 복잡한 기술적 문제들을 성과적으로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힘겨운 공사들을 제때에 해제꼈습니다. 제관공 원도중 동무와 연공 임창호 동무를 비롯한 용광로건설자들은 겨울에 높이 60메터나 되는 높은 곳에서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2개월 동안이나 작업하였으며 용광로의 로정설비를 지상에서 조립하여 올리는 것과 같은 놀라운 창발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홍도관 동무를 비롯한 축조공들은 엄동설한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11,000톤에 달하는 막대한 량의 내화벽돌을 축조하였으며 선진기술에 기초한 새로운 해탄로건설에 성공하였습니다. 최윤명, 리문관 동무들을 비롯한 용접공들은 낡은 용접방법을 버리고 대담하게 선진용접방법을 적용함으로써 공사기일을 3분의 1로 앞당기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습니다.


황해제철소에 용광로와 해탄로를 건설하는 복잡하고 방대한 공사는 설계로부터 기계설비의 제작과 그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이 다 우리 로동자들과 기술자들 자신의 손에 의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우리의 청소한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들의 선진기술과 경험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일제 때의 여러 가지 기술적 결함을 근본적으로 퇴치하고 용광로와 해탄로는 물론, 용수, 동력계통까지도 완전히 선진기술에 기초하여 새롭게 설계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제철소복구건설을 통하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술자들은 자체의 힘으로 능히 현대적인 제철소를 설계할 수 있게 되였으며 우리의 기계제작공업은 그에 필요한 설비를 자체로 생산 보장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로동자들은 가장 복잡한 구조물과 설비들을 훌륭히 조립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흑색금속공업의 앞으로의 발전에서 고귀한 밑천으로 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공업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는 뚜렷한 증거로 되며 우리가 능히 5개년계획의 웅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믿음직한 담보로 됩니다.”


 

김일성은 상당한 기술력을 요구하고 규모도 방대한 1호 용광로, 해탄로 복구사업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로 당시 황해제철소의 노동자, 기술자들이 이룩한 각종 기술혁신의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이것이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경제발전노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향후 경제발전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믿음직한 담보라고 그는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연설에는 두 가지 지점에서 약간의 우호적인 해석, 혹은 왜곡이 들어 있다. 그는 1호 용광로, 해탄로 복구사업이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 실질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19577월부터였기 때문에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황해제철소 복구사업 계획은 1953년부터 시작된 전후복구사업 계획에 들어 있었고 용광로와 해탄로의 규모와 완공기일이 정확히 정해진 것은 1956119일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였다. 중앙 정부 차원의 실행 계획은 이미 이때 수립되어 실행에 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현장 차원의 계획 실행 단계가 진행된 것은 천리마운동이 시작되던 19561228일과 김일성이 직접 현지지도한 195713일이었다. 김일성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후 현장에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은 19572월이었다. 이렇게 따지면 복구 사업 기간은 길게 보면 17개월, 짧게 잡아도 14개월이 걸린 것이었다.


물론 19574월까지 계획이 전혀 진척되지 않아 당중앙위원회 지도그룹이 직접 파견 나가 실행계획을 수정, 재정비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실행 시작시점을 그 이후로 잡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계획기간 산정 방법과 다르게 계산하여 19577월로 시작 시점을 잡은 것은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거의 첫 사례에 해당하는 이 사업이 어떤 경우보다 빨리실행에 옮겨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복구사업이 자체의 힘만으로 진행되었다는 것도 약간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지점이다. 1956년에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간한 󰡔조선중앙년감 1956󰡕1960년에 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에서 발간한 󰡔해방 후 우리나라의 인민 경제 발전󰡕에 나온 전후복구사업 당시 사회주의나라들의 원조 규모 및 내역을 보면 동독이 황해제철소 복구 건설에 지원을 하였다고 나와 있다. 전쟁 직후 사회주의 국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북의 전후복구사업을 지원하였다. 기본적으로는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공급하는 형태였는데 해당분야 기술자를 직접 파견하여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간접적인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복구대상을 정해 복구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책임지는 직접적인 지원도 이루어졌다. 동독의 지원은 특히 북 경제회복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북은 함흥시 거리 중 하나에 동독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 빌헬름 피크 거리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황해제철소 복구사업에 동독을 비롯한 외부의 지원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1호 용광로, 해탄로복구사업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처음부터 자체의 힘으로 진행하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으므로 외부의 도움이나 지원은 직접적인 형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설비들을 직접 지원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필요한 기술도 직접 동독 기술자들이 와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현장 기술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자문을 구하는 간접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어쨌든 지원이 완전히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원을 가지고 자체 힘으로 복구하였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애매하지만 김일성의 주장이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1호 용광로, 해탄로복구사업이 한참 진행되던 1957년은 북 대중운동이 개별적인 기술혁신운동에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으로 진화,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과학원이 공식적으로 현장에 파견되기 시작하던 시기와 겹친다. 따라서 당시 복구사업은 과학원을 비롯한 과학자,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은 기술혁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예정 기일을 앞당기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복구사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던 설계문제를 해결하는 데나 마지막까지 복구하기 힘들었던 송풍기 수리 과정에서 과학원을 비롯한 외부 과학자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 기술혁신운동의 중추는 현장의 혁신노동자들과 오랜 노동자들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기술혁신을 통해 복구사업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 김일성이 위 연설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었다. 관료로 진출한 일부 기술자들이 보수적 성향을 나타낸 데 비해, 오랜 세월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기술을 체득하고 현장 상황을 자세하게 알고 있던 그들은 상당히 진취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배움이 짧아 새로운 기술이나 설비를 발명하지는 못하지만 실제 작업 과정의 모순을 수정하면서 작업공정 차원의 수정이나 개선을 통해 기술혁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진취적인 자세와 혁신 의지가 자칫 늦춰질 수 있었던 공사 일정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여러 자료에 거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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