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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13.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근로대중이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게 하라.



1957년부터 시작된 제15개년계획은 예상치 못한 근로대중들의 호응(이후 천리마운동으로 이름붙여졌다.)으로 인해 2년 반만에 초기 계획이 달성되었다. 계획 시행 1년 만에 초기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여 19583, 급히 소집한 제1차 당대표자회는 초기 계획을 수정하여 제15개년계획을 1년 앞당긴 1960년에 마무리짓고 새로운 장기 계획을 1961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계획된 것이 제17개년계획이다. 1967년에 마무리짓기로 했던 제17개년계획은 이전 계획과 달리 목표달성이 어렵게 되자 196610월에 소집된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3년 연기되었다.


이런 흐름만 보더라도 1960년 즈음은 북 사회 전체에서 경제발전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사실 그 이후 북 역사에서 이 당시만큼의 급격한 경제성장율에 도달한 시기가 없었다. 19619월에 개최된 제4차 당대회를 북에서 승리자의 대회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북 지도부는 예상보다 뛰어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까닭을 근로대중들의 열정적인 호응과 함께 효과적인 과학기술 정책의 수립 및 집행때문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새롭게 시작하는 17개년계획의 핵심적인 목표(기본 과업)전면적 기술개건(기술혁신)’, ‘기술혁명을 제시하였다. 앞선 나라들을 단기간에 뒤좇아 따라잡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을 앞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1960년 중순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기술혁명을 수행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지금 시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인재를 충분히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인재에 대한 문제가 지금 매우 날카롭게 나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우리나라의 공업과 농업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기술혁명이 매우 빨리 추진되고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사회주의건설이 빨리 진척됨에 따라 오늘 기술인재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때보다도 절박합니다. 우리 당은 민족기술간부의 양성을 위하여 계속 많은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지난해에는 대학을 22개로부터 37개로 늘이고 전문학교도 많이 증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가는곳마다에 새로운 기술이 절실히 요구되며 현대적 기술을 다룰 줄 아는 인재가 굉장히 많이 요구됩니다. 기술인재 양성사업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켜 유능한 기술간부를 더 많이, 더 빨리 길러내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 없습니다. 기술인재양성사업을 나라의 생산력발전과 기술혁명의 빠른 속도에 따라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 당이 여기에 주목을 돌리고 모든 조건과 가능성을 백방으로 리용해야만 합니다. 사실 한 해에 대학을 15개나 더 내온 것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이런 대담한 조치를 취하였지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앞으로 7개년계획기간에 기술혁명을 전면적으로 실현하고 우리나라를 발전된 공업국가로 만드려면 기술간부대렬을 획기적으로 늘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정규적인 대학들만 가지고는 모자라며 반드시 큰 공장, 광산, 기업소들과 농목장들에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기술대학들을 널리 설치, 운영하며 통신, 야간 교육 등을 적극 발전시켜 근로자들 속에서 짧은 기간내에 많은 기술자들이 자라나도록 하여야 합니다.


대학을 나오고 경험을 많이 쌓은 기사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문학교를 나온 기수만 하더라도 큰 역할을 합니다. 창성군의 한 농업협동조합에 배치된 기수 동무는 차련관잠업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나이 어린 처녀인데 조합에 오자마자 양잠에서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그전에는 누에알 1그람에서 17키로그람의 고치를 생산하였는데 이 동무가 배치된 다음부터 그것이 34키로그람으로 올라갔습니다. 공업전문학교를 나온 젊은 기수들은 지방방직공장에 배치되자마자 자체로 나무를 깎아 력직기를 만들고 방직설비들을 동력화하는 일들을 대담하게 추진시키고 있습니다. 기수만 하여도 이러하니 매개 협동조합과 공장마다 유능한 기사가 배치된다면 이르는 곳마다에서 더욱 큰 혁신이 련달아 일어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학교들과 공장, 광산, 농촌, 어촌들에서 더 많은 우수한 기술자들을 더 빨리 키워내는데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김일성의 발언은 단순히 과학기술자를 많이 양성하자는 수준이 아니었다.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만들어내는 수준 높은 사람들도 있고 이를 현장에서 적용하면서 생산에서 걸리는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중, 하위 수준의 사람들도 있다. 김일성이 전 당적 노력을 기울여서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과학기술자는 상위 수준이 아니라 중, 하위 수준의 과학기술자였다. 그는 지난 시기 동안 적극 노력하여 고급 과학기술자를 나름대로 확보하였고 1958년부터 시행된 현지연구사업을 통해 이들의 연구가 생산까지 직접 이어질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 놓았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가 리승기의 비날론, 려경구의 염화비닐, 마형옥의 갈섬유, 한홍식의 무연탄 가스화, 주종명의 함철콕스, 리재업의 합성고무라고 생각하였다. 자동차, 오토바이, 트랙터, 굴착기, 불도저 등 중대형 산업장비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된 것도 이런 생각의 전환에 기여를 하였다.


혁명이란 일부 선각자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아니라 물적, 사회적 관계 변화에 따른 일반 대중들의 인식 변화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기술혁명도 소수의 고급 과학기술자에 의한 획기적인 발명이 아니라 근로 대중들의 기술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는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북은 초기부터 대중적 합의를 중요시하는 편이었지만 천리마운동을 통해 대중적 합의와 열의가 생산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면서, 과학기술 발전이 생산력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중간단계로 근로대중이 과학기술력을 보유하는 것을 설정하게 되었다. 즉 직접적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은 과학기술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근로대중에 의해 달성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 과학기술의 특징 중에서 자체 연료, 원료, 기술, 인력을 중시한다는 것과 함께 인민대중의 창조적인 힘에 의거한다는 부분이 들어가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 하위 수준의 과학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김일성은 일하면서 배우는 기술대학을 대대적으로 설립하고 적극 가동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이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설비 수준이나 인력 운용 면에서 여력이 있는 공장과 농목장 등에 전문대학 수준의 기술교육 기관을 만들고 이곳에서 직접 기술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다. 공장 지배인이 학장이 되어 전체 관리를 하고 자금은 대학이 설립되는 공장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업체와 가정, 대학이 합심하여 자체 조달하도록 하였다. 공장 자체가 실험 및 학습장으로 이용되었고 노동현장, 기계 옆에서 수업이 직접 진행되도록 하였다. 이런 종류의 대학을 공장대학이라고 불렀다.


공장대학 설립과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교재를 만들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 인력의 확보였다. 공장대학이 이때에 와서야 설립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교수 인력의 부족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장대학의 교수는 1958년부터 대대적으로 현장에 진출한 과학기술자들이 담당하였다. 현지연구사업이 시행되면서 활동 공간을 연구소가 아니라 현장으로 이동하였던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생산현장에서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현지연구사업이라고 한다면 생산현장에서 과학연구활동과 기술교육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는 공장대학현지교육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북의 대부분 정책이 소규모로 파일럿 사업이 시행된 후 더 큰 규모에서 일반화되어 적용된다. 공장대학 설립과 관련한 정책은 이전에 혁신자 학교라는 형태로 진행된 경험이 일반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585월 경부터 도입된 혁신자 학교생산 혁신자들과 그 뒤를 따라 가고 있는 선진 노동자들이 작업방법을 습득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방조도움를 주며, 기술 일군들을 집단적 혁신운동에 적극 인입참가시킴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으로 되며 노동자들의 기술기능 제고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파견된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활용하여 수준 높은 기술 지식을 전수해주는 혁신자 학교가 보통 수준에서 일반화되어 전국에 확대실시된 것이 바로 공장대학이었다.


생산활동과 과학연구활동 사이의 연결 통로를 확보해 서로 간의 거리감을 줄여준 현지연구사업은 이전까지 막연하게 설정되어 있던 생산력으로서의 과학연구활동과 생산활동에 대한 관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적 과학기술운동’,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 교육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도입된 정책이 바로 공장대학이었다. 북의 대중적 과학기술운동에 대한 고민과 구체적인 실천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앞선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만 하더라도 이 시기를 지나서야 대중적 과학기술 교육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1960년에 도입되기 시작한 공장대학은 1962년 말에 15개가 설립 완료되었고 1970년에는 40개가 운영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기사의 40~80%가 공장대학 출신이었다. 최근에는 전체 대학의 40%가 공장대학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공장대학 도입 당시에 기계제작공업, 전력공업, 화학공업 분야 기술인재 확보가 우선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공장대학의 학과들도 이들 관련 학과가 많다.


북의 역사 기술은 그 연원을 계속 소급적용하여 시작 시점이 계속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공장대학 설립도 분명 196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당시 평남 성천군 통선면 군자리에 있는 군수공장에 공장야간전문학교이 세워졌고 뒤이어 그곳에 첫 공장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1951년 당시 공장대학은 임시적인 것이었고 1960년대 당시에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연원을 1951년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