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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

4.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12월 29일,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 더보기
3.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4월 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 더보기
2.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더보기
최근 북한의 변화,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최근 북한은 과학기술을 앞세워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경제발전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2018.4.20) 그러면서 과학기술과 교육을 더욱 신경 쓰자고 했는데, 최근에 공부하다가 보니, 북한이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가 예상보다 많이 진척되었다고 느꼈다. 스스로 북한의 흐름을 많이 알고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반성했다. 그것도 2번이나.... ㅜㅜ 최근에 내가 알게 된 흐름을 대략 정리해보면, - 쓸만한 기술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이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허/발명 중에서도 경쟁력 있는 것을 추리는 작업이 진행된다는 것은 기존의 기술들이 정리되고 있는 상태이고, 여기에 더해서 다시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라 볼 수 있다. - 기술 인력들의 재배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