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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2) 과학기술로 북한읽기 3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1/3) : 1940~60년대초.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 라는 계간지에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라는 글을 썼습니다. 

간추리긴 했지만 조금은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써서 발표하지 않은 1970-80년대 이야기와 

최근의 북한 경제, 사회의 변화를 부문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썼습니다. 

북한 사회가 더디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빠르게 혁신 친화적인 체제로 변하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3년주기설, 그리고 스핀오프 전략의 실행 등을 이야기만 하고 글로 많이 쓰지 않아 대략의 흐름을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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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1/3) : 1940~60년대초.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Freie Universität Berlin Institut für Koreastudien, Affiliated Fellow)

 

오늘날 우리 삶에서 ‘과학기술’은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일상생활과 적당히 거리가 있는 듯하게 과학기술을 소개해 왔다. 하지만, 요즘은 스마트폰과 같은 첨단기기들이 생필품이 되어가고 있고 인공지능(A.I)이라고 하는 첨단기술들이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생활 속에 파고 들고 있어서 과학기술의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과학기술은 경제활동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고, 우리 생활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과학기술을 중심에 놓고 정책과 미래비전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북한과 연결시켜 이야기하면 모두들 놀란다. 북한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고, 평양 시내에 교통 정체가 생길 정도로 자동차 운행이 많아졌다는 소식에도 놀란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라는 이야기를 ‘과학기술 수준이 뒤떨어져 있다'와 같은 뜻으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의 북한 이미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북맹(北盲)’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의외로 ‘과학기술의 중요함’을 일찍부터 강조한, 과학기술 중심 국가였다.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1945년 해방 직후부터, 과학기술을 무엇보다 앞세워 지원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20년에 접어들면서 북미 사이의 비핵화 협상을 거부하고 ‘전면돌파전'을 선언한 김정은 위원장이 ‘과학기술은 핵심 전략자산’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면서 기술혁신을 주장하던 김일성 주석과 첨단 과학기술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를 적극 활용한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하였던 김정일 위원장의 지향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글에서는 북한의 70년 역사를 과학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훑어보고 오늘날 북한의 변화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1947년 2월: 북조선중앙연구소 설립. 과학기술 우선 정책의 출발, 과학기술자 부족으로 좌절.

1952년 12월: 과학원 설립. 북한 과학기술계의 중추 연구 기관.

 

북측 지역에 정부 조직이 세워진 1948년 이전에, 장기적 전망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이 1946년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앙 단위의 과학기술 연구소인 ‘북조선중앙연구소’가 1947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국가 단위의 경제발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마련한, 또 다른 장기적 전망에 따른 조치였다. 경제발전 계획 혹은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이전에 과학기술 관련 연구와 정책 실행방안을 마련하는 북한의 전통이 이미 194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지도부가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우선시하는 전통의 시작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일제 시기 북측 지역에 많이 세워진 공업시설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되찾은 나라를 공업국가로 만들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협력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나아가 그들이 연구에 전념하면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종합대학도 막 설립되었던 터라 별도의 연구기관을 제대로 운영하는 것은 부담이 큰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인재 부족 문제가 컸다. 일제의 교묘한 정책으로 인해 조선인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과학기술자는 남북한 통틀어 400여명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 북측 지역 내에 있었던 사람은 10여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결국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국가 단위의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를 만들려는 시도는 1952년 12월에 결실을 맺었다. 전쟁이 국지전으로 바뀌었고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전후 복구사업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중앙연구소를 만드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남측 지역에 머물고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월북 유도한 성과와 함께, 자체 교육기관을 통한 인재 양성 그리고 소련 등으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의 사업을 통해 나름 많은 수의 전문 인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전문 과학연구활동과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활동을 동시에 담당할 수 있는 ‘과학원(오늘날, 국가과학원)’을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북한 과학기술계의 중추 기관으로 작동하고 있다. 

과학원 설립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조선과학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소련 과학 아카데미를 그대로 모방한 형태로 기획되었다. 아카데미는 전문 과학연구활동만 담당하고 생산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지원활동은 생산성(내각) 산하 연구소를 별도로 설치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과학원은 설립 직후 조선의 현실에 맞는 연구를 수행하고 생산현장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공학연구소’를 과학원 내부에 설치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과학기술 활동의 ‘주체화’를 위한 첫 조치였다. 정치, 사상 부문의 주체화가 1960년대부터 가시화되었다면 과학기술계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1956년 12월 : 천리마운동 시작, 지원이 대폭 줄어든 상태에서 목표는 더욱 높인 계획 수행하기 위한 (기술)혁신운동

1958년 1월 : 현지연구사업 시작, 고급 과학기술자들이 현장에 진출하여 연구-현장지원 동시 시행. 현장 중심 전통.

 

1953년부터 시작된 전후복구사업은 계획대로 1956년에 마무리되어 갔다. 이에 따라 1957년부터 본격적인 경제발전계획에 따른 ‘1차 5개년계획’이 시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56년 12월 접어들면서 소련은 원조 규모를 대폭 줄이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전후복구사업보다는 줄었지만 계획 상 수입의 상당량을 담당하던 해외 원조가 대폭 줄어들어 계획 실행 자체가 어렵게 된 셈이다. 

하지만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12월 중순 급히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원래 계획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대신 현장에서 ‘예비’를 철저히 찾아 활용하고, ‘절약’과 ‘증산’을 강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새로운 작업방식, 즉 ‘혁신’을 통한 목표 달성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모든 지도부들이 현장에 직접 내려가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썼다. 당시 가장 큰 문제점은 강재생산이 부족한 것이어서 이를 담당하던 ‘강선제강소’로 김일성 주석이 직접 내려갔다. 생산현장에서 중간 관료들을 제쳐두고 최고 지도부와 기층의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 결과, 원래 6만 톤 수준이었던 1957년 강재 생산 목표를 9만 톤으로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최종 결과는 이보다 3만 톤이나 더 많은 12만 톤이었다. 생산 현장 중심으로 생각하고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천리마운동'의 시작이었다. 

1957년 천리마운동은 준비되지 않은, 우발적인 대중운동 혹은 기층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된 생산 전반에 걸친 ‘혁신’운동이었다. 이것이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조직적인 ‘기술혁신’운동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1958년 1월부터 시작된 ‘현지연구사업’ 때문이었다. 이는 인력부족 등의 이유로 생산현장에 대한 과학기술적 지원활동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원에 모여 있던 고급과학기술자들을 생산현장에 파견하여, 기술지원활동과 전문 과학연구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조치였다. 그 결과 생산현장의 기술수준이 대폭 높아지고 기술혁신이 가속화되었으며 생산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5개년 계획의 목표치가 2년 반만에 달성되고 1년 조정기까지 거친 후 4년만에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천리마운동이 단순한 혁신운동에 그치지 않고 기술혁신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장으로 진출한 과학기술자들은 이런 변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지지도라는 북한 특유의 현장중심 전통이 확립된 계기가 되었다. 

 

1961년 9월 : 4차 당대회, 승리자의 대회. 경제의 양적 성장 뿐만 아니라 기술혁신 등 질적 성장 확인

 

1961년은 북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한 본격적인 경제발전계획인 ‘1차 5개년계획(57~60)’을 2년 반만에 끝내고 1년 조정기까지 포함하여 4년만에 앞당겨 마무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의 공업생산증가율은 36.5%로 원래 계획인 22%를 훌쩍 뛰어 넘었고 동시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연평균 성장률 9.5%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런 경제성장이 단순한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을 동반하였다는 데 의미가 컸다. 전쟁으로 인해 성인 남성의 수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에 노력 동원만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과학기술계의 자체 성과뿐만 아니라 이들의 지원에 힘입은 기술혁신운동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이었다. 

1961년 5월 세계 최대 규모의 비날론 공장이 준공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석유를 활용하는 나일론과 달린 비날론은 북한에 풍부한 석탄을 활용하여 만드는 합성섬유이다. 이를 발명한 사람도 일제 시기에 박사학위를 받은 조선인 리승기 박사였다. 즉 조선 사람에 의해 발명되고, 조선에 풍부한 자원으로 만들었으며 면과 유사한 성질을 가진 비날론을 공업화하는 정도를 넘어 세계 최대 생산규모를 가진 대규모 공업화에 성공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정립된 ‘주체’라는 개념이 과학기술계에서, 특히 비날론 공업화를 통해 물질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셈이다. 감자가 아니라 북한에 풍부한 카바이드를 원료로 합성고무를 만드는 방법과 코크스를 사용하지 않는 제철 방법 등을 개발한 것도 ‘주체’가 재료와 원료의 자립까지 뜻하는 것으로 개념을 보강하는 데 활용되었다. 

비록 역설계 방식이긴 하지만, 대형, 정밀 기계장비인 자동차, 굴착기, 트랙터, 불도저, 전기기관차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해낸 것은 공업화 수준을 단번에 올려놓은 사건이었다. 해방 직후 다른 공업 부문보다 기계공업 부문의 수준이 남한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는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기술 수준이 급격히 높아졌던 것이다. 

1961년 9월에는 북한 최초로 전자계산기(컴퓨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후 생산현장에서는 컴퓨터를 활용한 생산 자동화에 대한 논의가 적극 시작되었다. 오늘날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의 ICT 기술은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제작 기술과 ICT 기술이 결합된 CNC기술, 즉 컴퓨터로 조종되는 공작기계 제작 기술(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은 이 당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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