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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2.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수 있게 만들어줍시다.”


저를 높이 평가하여 이런 큰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여기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이 이곳 담양으로 내려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아직 많습니다. 게다가 제 식구들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도 과학기술을 홀대하면서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미군정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북에서는 인민위원회 차원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갑시다.”


북도 남도 모두 제 조국입니다. 여기서도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일들이 많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벌여놓은 일들도 아직 많습니다. 제가 갈 생각이었으면 저번에 려경구 선생이 올라갈 때 벌써 따라 나섰겠지요. 미안합니다.”


리 선생, 우리는 선생의 재능과 이상을 높이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생의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조선이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선생의 식솔은 물론 제자들도 함께 오세요. 과학기술적 재능을 가지고 우리와 이상이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여건이 안 되는 이곳에서 선생과 제자들의 재능을 썩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합시다.”


미안합니다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생각을 충분히 해보시되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들어 드릴테니...”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 발전 없이 경제가 발전할 수 없는 사회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일제 식민 지배를 받은 조선에는 과학기술 발전을 담당할 과학기술자가 태부족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 조선인이 과학기술 관련 교육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식민 조선 내에는 과학기술 관련 교육기관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학제를 이상하게 비틀어 조선인이 일본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교묘하게 민족적 차별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인에게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45년 해방 당시 남북 통틀어 대학을 졸업한 고급 과학기술자는 4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북에 남아 있던 고급 과학기술자는 10여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북 지도부는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시간도 짧게 걸리고 효과도 큰 이남 지역에 머물고 있던 고급 과학기술자들을 북으로 유치하는 사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과학기술자 월북 유도사업은 포섭대상자와 친분이 있는 고급 과학기술자가 직접 내려와 실행하였다. 그들은 북 최고 지도자의 위임장을 갖고 다니면서 각종 지원 제안의 담보로 활용하였다. 대부분의 고급 과학기술자들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고 지도자의 약속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과학기술 연구 활동은 자원도 충분히 확보되어야 함은 물론 자금과 인력도 많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중앙 차원의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 대한 보장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라도 김일성의 위임장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자들은 대학 교수 직책을 상당히 선호하면서 연구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실험실 혹은 시험장을 갖고 싶어 했다. 당시 월북 과학기술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북 지도부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여기서 분화해 나온 평양공업대학과 사리원농업대학, 평양의학대학을 일찍부터 만들어나갔다. 1947년에는 흥남화학공업대학을 새로 설립하기까지 하였고 대학의 초기 교수진 중 상당수가 월북 과학기술자로 채워졌다.


또한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게는 풍족한 생활환경을 보장해주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안전한 후방으로 먼저 이동시켜 주었다. 또한 전쟁 시기에도 연구가 중단되지 않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선이 휴전선 근처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1951년 중순부터 대학을 비롯한 각종 연구기관 및 연구기관들은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1952년에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과학기술 연구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북 최대, 최고의 과학기술 관련 조직인 과학원이 설립되었다. 이때까지 중단되지 않고 수행되었던 연구들은 1950년대 말에 꽃을 피운다. 당시 경제성장 속도를 더욱 높여주었던 다양한 기술혁신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이러한 다양한 지원책을 앞세운 월북 유도사업은 남의 배척력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미군정청은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대학교수들을 배제하기 위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는 서울 시내에 소재하던 각종 단과대학들을 묶어 서울대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교수 재임용 심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교수들을 대거 탈락시켜버렸다. 또한 중앙 차원에서 과학기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도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연구 설비가 잘 갖추어져 있던 서울 공대 실험실을 미군정에서 사용한다는 짧은 통보만으로 며칠 만에 빼앗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설비와 기록들이 유실되기도 하였다.


남의 척력과 북의 인력이 잘 배합된 결과, 북은 상당수의 고급 과학기술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 끈질기게 진행된 월북 유도사업을 계속 거부하던 리승기도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대  7월에 서울에서 남으로 피난가지 않고 결국 월북 대열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까지 함께 데리고 월북하였다. ‘리승기 세력의 월북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학공업 분야의 최고 엘리트 과학기술 집단의 월북은 일제가 건설해두었던 각종 화학공업 설비들을 제대로 가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해방 전 여순공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해방 직후 스스로 귀국하여 경성대 물리학과를 정상화하는 데 앞장섰던 도상록 역시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북 물리학계를 이끌었다. 북에서 핵관련 연구와 반도체 연구 등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월북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리승기나 도상록 등과 같이 학문 내적인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도 있었고, 과학기술 정책과 경제 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데 핵심적인 일을 수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북이 일찍부터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과학기술적 내용까지 잘 아는 과학기술자들이 정책의 이해도나 기획력, 추진력이 높았기 때문에 중히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강영창, 김두삼, 오동욱, 로태석 등이다. 이들은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화학공업상 등을 역임하였다. 북 경제 성장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던 시기, 경제의 핵심 분야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월북 과학기술자, 그것도 대학 졸업 수준 이상의 과학기술자 수는 111명 정도이다. 인원수가 불과 4~5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 결과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될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를 일컫는 원사칭호를 받은 사람 10명 중에서 8명이 월북한 사람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높은 칭호인 후보원사를 받은 15명 중에 9명이 월북한 사람들이었다. 북 과학기술계 최고 원로 대부분이 월북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북 과학기술계는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초석이 놓여 졌고 그들에 의해 고등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이 정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까지 않은 결과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북의 과학기술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고 비날론, 염화비닐, 갈섬유, 무연탄 가스화, 함철콕스, 합성고무 등을 공업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발전전략이 수립되고 실행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