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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4.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1229,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에 비추어보면 화학연구소에서 담당하기로 했던 금속학과 기계, 전기, 건설 부문 등의 비중이 매우 커질 것이므로 별도의 연구소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우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여건이 되겠습니까? 이번에 8개 연구소를 내오는 것만으로도 아주 힘들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요.”


이 부분은 화학연구소 조직 구성에 대해 논의할 때 이미 결론이 난 것 아닌가요? 과학원에서는 물리,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생산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는 각 생산성 산하 연구소들에서 수행하기로 당시에 원칙을 정했습니다. 다만 분야들 사이의 연계를 위해 화학연구소 안에 작은 연구실 정도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지요.”


그렇지요. 과학원 안에 별도의 연구소를 두어 공학연구를 수행하게 되면 조직 구성원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과학원과 생산성 산하 연구소의 구분이라는 기본 원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시만요, 그 조직 구성원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련의 조직 구성원리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선진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것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우리 조선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우리나라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업 부문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자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기술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현재 과학원 조직 구성을 보면 이 부문이 너무 약합니다.”


맞습니다. 전국의 생산현장, 특히 산업현장에서는 과학기술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인데 이를 생산성 산하 연구소에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이죠. 중앙 과학기술 기관인 우리 과학원에서 이를 적극 책임져야 합니다. 특히 열악한 상황에서 제대로 일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잘하여야 하는데, 공학부문에 대한 과학기술 연구역량을 과학원에 집결시키는 편이 더 좋겠다는 겁니다. 소련식의 창조적 적용인 셈이죠.”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북에서 일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이후 소련쪽으로 바뀌었다. 북 주둔군으로 소련군이 들어왔고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도부가 새롭게 들어섰기 때문에 소련식이란 절대적 기준이었다. 이후 1950년대를 거치면서 북 지도부는 독자노선을 강력하게 추구하기 시작하였지만 정치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제대로 독자노선의 내용이 채워진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정치에서 북이 소련식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1956년경, 15개년계획을 입안할 때부터라고 하지만 제대로 자주, 자립, 자위, 주체라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은 1965년경이다.


과학기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 북에서 대학을 설립, 운영하고 과학연구기관을 세우는 데에 소련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소련으로부터 받은 4만 여 권의 책과 각종 실험도구 2600여 점, 도표 2200여 점은 김일성종합대학 기틀을 잡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1948721일에 파견된 소련학자 일행은 대학운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세계적인 생물학자 오파린(A. I. Oparin)을 단장으로 하는 소련학자 일행은 석 달 동안 머물면서 각종 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각 대학의 실험기구 설치 및 교수강령 작성을 도와주었다. 게다가 1952년 과학원 설립 초기에 과학원의 이름을 과학 아카데미라고 부를 정도로 소련 과학원을 공식적으로 모델로 삼았다. 처음에 의학부, 농학부, 공학부까지 포함하여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이 이후 이들 학부를 단과대학으로 독립시켜 기초연구 중심의 종합대학과 응용과학 중심의 단과대학 체계로 바뀐 것이나 전문 연구활동 중심의 과학원과 기술지원활동 중심의 생산선 산하 연구소로 과학연구기관이 이원화된 것도 모두 소련식을 모방한 결과였다.


이처럼 소련식을 그대로 모방하던 과학기술계 분위기가 자립화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52년 말이었다. 전문 과학연구활동을 담당할 과학원 산하에 공학연구소를 설치한 것과 생산 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과학원이 계속 참가한 것은 북 현실에 맞는 과학기술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그런데 북이 소련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말부터였다. 소련의 도움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작성하고 있던 과학발전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소련 정부도 1957년 말부터 과학기술 지원단을 철수시킨 뒤 더 이상 파견하지 않았다. 북 지도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과학원 구성원들을 생산현장으로 직접 파견하여 현장에서 커지고 있던 기술지원활동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로 하였다. 이는 현지연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어 19581월부터 시행되었다. 다른 영역과 달리 과학기술계의 독자노선은 1950년대 말에 이미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과학기술 활동의 독자노선화는 세계 과학기술계의 흐름과 동떨어져 뒤쳐질 수 있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다른 나라와 활발한 교류협력을 통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랜 기간의 봉쇄정책 속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핵시험과 인공위성 발사시험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자체적으로 개발, 보유할 수 있게도 하였다. 비록 다른 부문의 희생이 더 컸겠지만.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있으므로 섣불리 맞고 거름을 판단내리기 어렵지만 이런 것이 다른 나라와 다른 북 과학기술 정책의 특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