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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제

13.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근로대중이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게 하라. 1957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예상치 못한 근로대중들의 호응(이후 천리마운동으로 이름붙여졌다.)으로 인해 2년 반만에 초기 계획이 달성되었다. 계획 시행 1년 만에 초기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여 1958년 3월, 급히 소집한 제1차 당대표자회는 초기 계획을 수정하여 제1차 5개년계획을 1년 앞당긴 1960년에 마무리짓고 새로운 장기 계획을 1961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계획된 것이 제1차 7개년계획이다. 1967년.. 더보기
15.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년 11월 5일, 김일성은 기양기계공장에서 트랙터 시제품 조립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기양기계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양기계공장(‘금성뜨락또르공장’의 전신)은 원래 간단한 농기계를 생산하던 농기계제작소였지만 협동농장들의 기계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6년부터 기계공장으로 확장하면서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노력하던 곳이다. 김일성의 전화에 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이 응답했다. 그는 희천공작기계공장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트랙터 생산 책임을 맡으면서 기양기계공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더보기
16. 북 최초의 컴퓨터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 북 최초의 컴퓨터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이번에 과학원에서 만든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는 라는 5개의 장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숫자를 입력을 하고 어떻게 계산하라고 명령을 하면 전자계산기가 알아서 스스로 계산을 순식간에 한 다음,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어떤 계산을 알아서 해준다는 이야기입니까? 뭐든지 명령하기만 하면 다 되는 건가요?”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그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맞는 프로그램이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명령이 내려지면 전자계산기는 아주 빠르게 계산을 .. 더보기
18.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60년대 초 어느 날, 대안전기공장 제관직장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혁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사로 나선 기술부의 기사장은 기술혁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이라도 불합리하거나 불편한 것을 수정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과학기술을 잘 아는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업방법에서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직접 생산을 담당한 노.. 더보기
2.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더보기
3.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강호제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1946년 여름, 김일성은 남에서 어렵게 모셔온 과학자들을 만났다. “다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의 경제가 빨리 클 수 있으려면 과학기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열심히 해봅시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저희 같은 과학자들을 배척하고 있는데 북에서는 저희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해서 많은 고민 끝에 올라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현재 북에는 일제 시기 건설된 각종 공장과 생산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작동을 못 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일제가 도망가면서 고장낸 것을 고치지 못한 것도 많고 기술자가 부족하여 어떻게 작동시켜야 할지 몰라서 운영을 못하고 있는 것도 많지요... 더보기
북극성-2형 발사의 배경과 의미[2017.2.12] 북극성-2형 발사의 배경과 의미‘선제’ 도발보다는 ‘사후’ 대응 - 강호제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올해 초, 필자는 북한의 2017년 신년사를 분석하면서 대륙간탄도로케트(ICBM)과 정지위성, 두 가지 모두 발사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과학기술을 제1순위로 배치한 배경과 북한 경제 전망 (2017.1.18 통일뉴스))당시 분석글에서 필자는 미국이 1) “핵위협, 공갈 하지말고” 2) “문전앞에서 년례적이라는 감투를 쓴 전쟁연습소동 하지 않으면”, 북한이 ICBM을 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쏠 듯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신년사가 발표된 뒤로 로동신문에는 3월 대규모, 연례적 군사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리졸브 훈련이나 독수리 훈련을 ‘문전앞'에서 계속 진행한다면 전략 무기를.. 더보기
24.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강호제 (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4년 어느 날, 전쟁 시기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갔던 리종만이 귀국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리종만은 전국 각지에 10여 개의 큰 광산과 수백 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과 수백 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3:7 소작제를 시행한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을 지낸 일제 시기 대표적인 사업가 중 한 사람이다.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월북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그는 .. 더보기
2.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승기’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엄친아의 대명사, 가수, 허당’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북에서 ‘리승기’라고 하면 ‘과학자의 대명사’이자 가장 유명한 과학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합성섬유 ‘나일론’에 버금가는 ‘비날론’을 발명한 사람이다. 비날론의 발명과 이를 공업화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그는 1959년 처음 제정된 ‘인민상’의 과학자 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로력영웅’ 칭호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상과 김일성훈장까지 받았다.(제1회 인민상을 리승기와 함께 받은 기술부문 수상자는 주종명이다) 석유를 주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 더보기
1.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