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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혁신운동

10.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과학 연구 사업에 대한 토론 안건이 올려졌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기술지원활동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나 당 상무위원회에서 직접 과학기술 정책들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은 특별히 합성고무 연구사업에 대한 사업 보고가 계획되었다. 한 달 전에 드디어 합성고무연구가 완성되어 중간공장건설을 비롯한 사업진행을 검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난 전쟁 시기부터 합성고무 생산을 위한 연구에 깊은 관심을 돌려왔습니다. 당시 청수로 피해있던.. 더보기
13.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근로대중이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게 하라. 1957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예상치 못한 근로대중들의 호응(이후 천리마운동으로 이름붙여졌다.)으로 인해 2년 반만에 초기 계획이 달성되었다. 계획 시행 1년 만에 초기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여 1958년 3월, 급히 소집한 제1차 당대표자회는 초기 계획을 수정하여 제1차 5개년계획을 1년 앞당긴 1960년에 마무리짓고 새로운 장기 계획을 1961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계획된 것이 제1차 7개년계획이다. 1967년.. 더보기
8. 집단적 기술혁신운동 : 북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 1950년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도 '기술혁신'체제로 봐야 하는데, 하물며 2020년의 북한은? 더 후퇴했을까? 거의 최고 수준의 기술(기계, ICT, 연료, 제어계측, 소재 등)을 요구하는 ICBM과 SLBM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곳을?북한 경제 분석을 여전히, 수출입 통계와 탈북자 인터뷰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건 당연한데, 그럼 어떻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을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 집단적 기술혁신운동 : 북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년 9월 13일에서 16일까지 평양에서는 ‘전국.. 더보기
9. 천리마작업반 운동 :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천리마운동' 하면 대부분 낡은, 무식한, 노력동원 운동으로만 기억한다. 어릴 때 배운 윤리교과서 내용에 따라. 하지만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본 후 내가 내린 결론은1957년 우발적/산발전 천리마운동은 혁신운동1958년 조직적 천리마운동은 기술혁신운동으로 바뀌는 과정1959년 천리마작업반운동은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1958년 과학기술자들의 현장진출이 핵심 역할을 했지 따라서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기술혁신'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 2009년 김정일 위원장이 '제2 천리마운동'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잘 보면 '기술혁신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즘 이야기하는 '정면돌파전'도 무식한, 철지난 사상동원운동이 아니라 예비, 절약, 혁신을 기본으로 하는 '기술혁신운동'이라 볼 수 있다.. 더보기
15.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년 11월 5일, 김일성은 기양기계공장에서 트랙터 시제품 조립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기양기계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양기계공장(‘금성뜨락또르공장’의 전신)은 원래 간단한 농기계를 생산하던 농기계제작소였지만 협동농장들의 기계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6년부터 기계공장으로 확장하면서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노력하던 곳이다. 김일성의 전화에 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이 응답했다. 그는 희천공작기계공장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트랙터 생산 책임을 맡으면서 기양기계공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더보기
18.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60년대 초 어느 날, 대안전기공장 제관직장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혁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사로 나선 기술부의 기사장은 기술혁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이라도 불합리하거나 불편한 것을 수정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과학기술을 잘 아는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업방법에서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직접 생산을 담당한 노.. 더보기
1.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