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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11-1월호) 경락의 대발견

1961년 8월 평양의과대학 교수 김봉한은 “경락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강조되던 동의학(한의학)의 과학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경락(經絡)과 경혈(經穴)은 인체에서 기(氣)가 흘러다니는 길과 중요한 자극지점과 같은 것인데 한의학, 특히 침구학의 치료법은 모두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인체의 표피에 분포되어 있는 경혈을 찾아 적당한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그 경혈이 연결되어 있는 경락을 타고 몸속 장부에 전달되어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인 기는 물론, 경혈, 경락 등이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전혀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부를 해보아도 경혈과 경락에 대한 실체를 발견할 수 없어 한의학을 체계화, 현대화, 과학화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자도 아닌 서양의학자이자 생리학자인 김봉한이 경락과 경혈의 해부학적 실체를 찾았다고 밝힌 것이므로 그 반향은 매우 컸다. 논문 발표 이후 이와 관련한 학술토론이 수차례 진행되었다.

 

“김봉한 교수,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찾지 못했던 경혈과 경락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습니까?”

“우선 경혈과 경락을 염색할 수 있는 특수한 염색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냥 두어서는 다른 조직과 구분하기 불가능하지만 일단 염색하게 되면 그들의 계통이나 존재 자체를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있으므로 더욱 직접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염색약은 어떻게 개발할 수 있었나요?”

“저희 아버지께서 한약방을 운영하셔서 어릴 때부터 한의학에 대해 자주 들었고 공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양의학을 배우면서도 한의학에 대한 신뢰는 흐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저는 한의학 체계가 관념론적 차원이 아니라 철저히 유물론적 관점에서 세워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능과 실체는 확실히 조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의학, 즉 침구학의 효능이 확실하므로 이를 뒷받침하는 체계, 즉 경락과 경혈의 실체도 확신한 것이죠. 이에 대한 굳건한 신념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이들에 대한 해부학적 실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염색약을 발견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니까...”

“그렇지요. 제 연구의 전척은 염색약을 개발하는 순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경혈과 경락이 생명현상의 가장 근원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최근 서양 유전학에서 찾아낸 DNA와 관련한 물질들이 많이 분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부르조아 학문인 서양유전학을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예, 저는 서양유전학을 부르조아 학문이라고 하면서 배척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수상께서도 계응상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시면서 인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그래서 저는 경혈과 경락에 많이 분포하리라 예상한 물질들에만 반응할 수 있는 염색약을 찾기 시작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특수한 푸른색 염색약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직들과 다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우선 피부에서 염색된 지점들은 동의학에서 이야기하는 경혈과 대부분 일치했습니다. 이들의 배치는 경락의 흐름과 거의 같았구요. 경혈에 대한 자극은 일반적인 신경의 흐름과 달랐고 전달속도 또한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확대해서 보면 주변 조직과 다른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연구는 어떻 방향으로 더 전개하려고 계획하십니까?”

“실험 여건이 좀 더 갖추어지면 경락 계통 전체에 대한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는 분명 서양의학에서 이야기하는 혈관계, 림프계와 완전히 다른 제3의 순환계에 해당합니다. 인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락 계통에 대한 해부학적 수준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면 한의학 치료법도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비싼 약을 쓰지 않더라도 병증과 관련된 경락, 경혈을 찾아 적당한 자극을 가해주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되찾게 할 수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함께 연구해봅시다.”

 

김봉한의 1961년 첫 번째 논문은 한의학의 과학화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리승기의 비날론처럼 당시 북한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던 ‘주체’라는 개념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즉 주체성 있는 과학연구가 결국 주체의 과학성을 입증하게 된 것이다. 1965년 정식화된 주체의 개념은 이처럼 1950년대 발부터 과학기술 분야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확보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2년부터 김봉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거대했다. 실험장비도 전자현미경을 비롯하여 방사성동위원소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 등 당시로서 최첨단에 해당하는 고가의 장비들이 제공되었다. 또한 수많은 연구원들이 배치되었고 연구실이 40여개나 구비된 경락연구원도 동의학연구소와 별도로 구성되었다. 동의학의 일부 분야에 대한 연구소를 동의학연구소보다 더 크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는 의학계 전체를 대표하는 의학과학원과 대응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김봉한 연구팀은 1963년 11월에 두 번째 논문 “경락 계통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에서부터 경락연구내용은 ‘봉한학설’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연구결과에 개인의 이름을 붙여준 아주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1965년에는 세 번째 논문 “경락 체계”와 네 번째 논문 “산알 학설”을 동시에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의 경락연구는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발생학을 비롯하여 서양의학에서 밝힌 생리학 체계 전반을 바꾸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논문 “혈구의 <봉한산알-세포환>”도 1965년 후반에 발표되었다.

이처럼 획기적인 연구결과 생산하던 김봉한의 경락연구는 1966년 이후 갑자기 중단되었다. 갑자기 떠오른 만큼 사라짐도 갑자기 이루어졌다. 문제는 봉한학설이 사라진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릐센코주의가 몰락하였기에 학문내적으로 거짓이 판명되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당시 북한 내부에 또 한 번의 거대한 종파사건(박금철 이효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과 연관되어 사라졌다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황우석 사건이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황우석처럼 조작이 밝혀져 급히 폐기된 것 아니냐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즉 과학 내적인 문제냐 아니면 과학 외적인 문제냐 하는 논란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남한 학자들의 봉학학설 재조명 결과가 상당히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봉한학설의 퇴장은 적어도 조작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연구성과는 충분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한계와 실험과정에 대한 신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을 뿐이지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어 폐기된 자료라 하더라도 북한 어딘가에 당시 자료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날이 열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