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북한 신년사 분석과 전망 3

혁신의 무게중심 이동 : 부분보다 시스템 전체의 혁신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독일 튀빙엔대 Visiting Assistant Professor

강호제



2019년 신년사 발표와 이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2016년 7차 당대회 당시가 떠올랐다. 조선로동당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북한에서 당 관련 최고 수준의 행사가 37년만에 열린다고 하여 많은 언론 및 연구자들이 막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막상 7차 당대회가 개최되고 김정은 위원장의 총화보고가 공개되자 ‘제대로 된 분석은 없고 실망이다’, ‘별로 볼 것 없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개혁, 개방 혹은 비핵화 등과 관련한 자신들의 기대와 관련된 언급이 별로 없었다는 이유였다.

사실 7차 당대회에는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놀라운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경제강국 건설의 기관차’라고 하면서 ‘과학기술'을 첫머리에 두고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국방은 물론, 경제, 문화 등 사회 모든 부분의 발전을 이끌어보겠다는 생각이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핵심이었다. 심지어 북한의 자랑 ‘자력갱생' 노선도 과학기술의 뒷받침에 의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당대회에서 제시된 과학기술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 등을 읽어낸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많지 않았다. 이에 대해 관심 깊게 연구한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주장들을 단순한 말뿐인 수사(레토릭)로 치부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 중에는 과학기술과 관련한 내용이 많아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2019년 신년사 내용에도 과학기술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재와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내용은 이번 신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또한 2016년에 제시된 ‘5개년 전략'의 4년차에 해당하는 2019년의 신년사이니만큼 지난 3년 동안에 정책을 집행한 결과도 녹아있다. 게다가 2018년에 있었던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 의해 전략이 약간 수정된 점도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 부분의 혁신을 넘어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쪽으로 혁신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혁신 포인트가 점, 선과 같은 단순한 지점에서 벗어서 면이나 입체와 같은 복합적인 차원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인재와 과학기술은 사회주의건설에서 대비약을 일으키기 위한 우리의 주되는 전략적자원이고 무기입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만나기 1주일 전, 북한은 3차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경제-핵 병진노선의 결속’을 선언하고 ‘경제건설에 총력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 2017년 11월 29일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을 기점으로 핵무력을 완성하였으므로 이제 경제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언론이나 연구자들이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는 여기에 하나 더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였다. ‘과학교육’을 강화하자는 결정서가 하나 더 채택되었던 것이다.(여기서 ‘과학교육'은 교육 과목 중에서 과학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교육 둘을 합친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정책사를 전공한 필자에게도 살짝 의외로 느껴졌던 결정이다. 북한이 전통적으로 잘했던 돌격대나 속도전과 같은 형태로 경제건설에 몰입하자는 정책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달성될 수 있는 ‘교육' 관련 정책이 새롭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핵과 경제, 두 목표 중에서 하나를 달성했으니 경제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고, 과학기술을 앞세워 경제발전을 하겠다는 ‘과학기술 중시노선'에 입각하여 과학기술을 강조한 것도 당연하다. 여기에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이 구색 맞추기 위한 과제가 아니라 중심과제로 부각된 것은 놀라운 지점이었다. ‘사람 중심'이라는 ‘주체 사상’의 기본 시각이 영향을 준 듯하다.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자!》라는 구호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사실 교육관련 정책은 2012년 ‘새 세기 교육혁명'이라는 이론과 함께 김정은 집권 초기부터 적극 추진되었다. 의무교육 연한을 11년에서 12년으로 늘렸고 ‘기술고급중학교’라는 새로운 교종을 만들었으며 기존의 교과서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는 일을 지난 5년간 진행하였다. 대학도 분야별, 지역별로 종합대학으로 체제를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학교들을 광케이블로 단일한 국가망에 연결하는 작업도 일단락하였으며 2018년에는 그 대상이 지방의 분교로 확대되었다. 교육관련 인프라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실현하기 아주 어렵다. 게다가 안그래도 부족한 예산으로 학교 시설까지 새롭게 바꾸라는 정책은 저항에 부딪히고 어려움에 봉착하기 쉬운 일이다. 이에 3차 전원회의 당시 북한 지도부는 “모든 당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들이 과학교육사업에서 걸린 문제들을 하나씩 맡아 책임적으로 해결”라고 하면서 지방이 아니라 중앙에서 교육문제를 책임지고 챙기라는 결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당중앙위원회 성원들이 직접 사업을 챙긴 사례는 산림복구와 관련한 사업 이외에 거의 없었다.

2019년 신년사에는 교육 정책의 집행을 보장하기 위해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투자, 지원을 늘이자고 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전체 국가예산을 연 평균 6.3% 늘릴 동안 교육예산은 약 7.3% 증액했다. 아마도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당중앙에서 직접 챙기게 하면서 결정권한의 문제 등을 해결하고 국가 예산 투입을 늘여 투자재원을 마련하여 기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갖추었다고 판단한 듯, 올해부터는 교육 사업의 양적 변화를 넘어 ‘질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인재를 질적으로 키워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육 내용과 방법의 혁신을 제기하고 있는 만큼 올해에는 교육부문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벌어지리라 예상된다.


“전력부문을 최고생산년도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유럽의 북한 학자들 사이에서 북한을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인공위성에서 한반도를 밤에 찍은 사진을 보면 북한 지역만 검게 나온다는 이유에서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 남한 쪽은 대낮처럼 밝은데 북한 쪽은 평양을 비롯한 몇 군데만 빼고는 대부분 검게 나타나는 사진은 북한의 전력난을 넘어 경제 전반이 낙후되었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핵문제도 결국 북한의 극심한 전력난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전력생산을 ‘최고생산년도' 수준까지 끌어올릴 것을 제안하였다. 부문별로 모두 다르지만, 보통 북한에서 ‘최고생산년도'라고 하면 1980년대 후반 즈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북한 경제가 극심하게 무너지기 직전, 제일 잘 살 때 수준으로 전력생산량을 높이겠다는 뜻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17년 1월 조선신보와 진행한 전력공업성 국장의 인터뷰를 보면 7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5개년 전략’이 끝나는 시점에 전력생산량은 최고생산년도의 1.3배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목표에 비추면 올해 최고생산년도의 돌파는 약간 늦은 감이 있다. 2018년 7월 어랑천발전소 현장을 찾아 김정은 위원장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년간 공개된 전력부문 성과들을 보면, 개별 발전소나 지역별로 최고생산년도를 돌파한 곳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 미진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 생산과 관련하여 2018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생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교차생산'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것이다. 교차생산이란 전력생산이 충분하지 않아 모든 생산시설에 24시간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 시간을 정해 순차적으로 전기를 몰아주는 생산방식을 말한다. 즉 전기가 공급될 때와 공급되지 않을 때를 잘 나누어 작업 공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전력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교차생산'에 대한 언급은 2016년 제7차 당대회부터 2017년 신년사, 2018년 신년사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던 내용이다. 그런데 2019년 신년사에서 전력부문의 과제로 ‘교차생산'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는 것은 이제 교차생산을 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이미 도달하였거나 조만간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블랙홀이라 놀림받던 북한의 밤하늘 사진에서 밝은 불빛의 갯수가 늘어나고 있고 밝기가 커지고 있는 만큼 전력생산량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교차생산을 논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18년을 기점으로 전력 생산과 관련하여 큰 변화가 생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은 ‘국가통합전력관리체계'의 도입이다. 통합전력관리체계는 생산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통합생산관리체계'와 소비를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통합부하관리체계'를 합친 것인데 2010년대 전후로 함경남도와 평안남도 수준에서 개발되던 것이다. 원래는 함경남도, 평안남도를 비롯하여 지방의 도 수준에서 시스템을 차근차근 개발, 도입할 계획이었는데 2017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전국 단위로 확대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국가통합전력관리체계 ‘불야경’이 2017년 후반기부터 가동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북한의 전력문제에 대한 대응이 생산, 소비, 송배전 등 일부분의 문제 해결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를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한 전력의 가장 큰 문제는 낡은 발전시설과 함께 송배전 시설의 낙후였다. 하지만 이는 지난 10여년 동안 많이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직접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의 터빈을 새롭게 개보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9년 처음으로 CNC의 첨단을 돌파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 첨단 CNC기술을 적용한 곳이 바로 대안전기공장에서 터빈을 만드는 공정이었다. 또한 2015년을 전후하여 광케이블을 비롯한 전선 일체를 교체한 실적이 자주 거론되는 등 송배전 시설도 많이 개선되었다. 점, 선과 같은 부분적 혁신에 집중한 결과였다.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 곳의 피해가 전국 규모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별, 지역별 ‘분산형'으로 전력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효율의 측면만으로 보면, 전국을 하나로 묶는 ‘통합형’ 시스템이 더 좋다. 따라서 분산형에서 통합형으로 전환한 것은 전쟁의 위험이 거의 없어졌다는 자신감에 따른 결정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9월 수소탄 시험 성공은 이러한 자신감의 근거로 작용하기에 충분하였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전력문제는 2018년을 기점으로 교차생산을 고민하지 않아도 될 수준 근처까지 왔고, 부분의 문제가 아닌 전체 시스템 차원에서 전력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기반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최고생산년도 돌파라는 수치성 목표까지 제시될 정도로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밤하늘이 더욱 밝아질 것을 기대하게 한다.


“실용적이며 경제적 의의가 큰 핵심기술연구에 력량을 집중하며 경제장성의 견인력을 확보”


2016년 7차 당대회에서 ‘과학기술강국'이라는 목표가 제시되었다. 이를 김정은 위원장은 “나라의 전반적인 과학기술이 세계첨단수준에 올라선 나라, 과학기술의 주도적 역할에 의하여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부문이 급속히 발전하는 나라”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과학기술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을 지양하고 경제에 실제 도움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올해 과학기술 관련 언급 중에 ‘실용', ‘경제적 의의', ‘경제장성의 견인력'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이다. 올해만의 특별한 언급이 아니라 일반적인 북한 과학기술 정책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올해 과학기술 부문에서 ‘역량을 집중'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5개년 전략의 4년차를 맞아, 부분의 혁신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혁신을 추구하는 단계에서 역량을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김정은 시기 들어서 선정하기 시작한 ‘최우수 과학자 기술자’들의 활동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북한에서는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 특출한 기여’를 한 과제나 과학기술자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고 혁신을 계속 장려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해 가장 우수한 성과를 거둔 과학자, 기술자 5~6명을 뽑아 ‘최우수 과학자 기술자’로 선정하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상이라 할 수 있다. 최우수 과학자 기술자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22명이 선정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국가통합전력관리체계의 완성과 도입에 기여한 ‘김책공업종합대학 전력계통연구소 소장 공훈과학자 박사 부교수 김덕수’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최고 과학자 기술자’로 선정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 중에서 확장성이 가장 크고 생산 현장에 도입했을 때 효과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은 ‘통합생산체계 미래 102’를 개발하여 2015년에 수상한 ‘국가과학원 정보과학기술연구소 소장 최성’이다. 그는 생산현장의 자동화, 현대화에 필요한 ‘자동화, 무인화 시스템’ 개발이 주력 분야이다.


‘미래 102’는 다양한 생산현장의 경험을 일반화, 표준화하는 과정에서 만든 분산형조종체계인데 2014년 말 즈음에 완성된 듯하다. 생산현장의 자동화, 무인화를 위해서는 매번 각 현장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성능도 들쭉날쭉이었다. 하지만 ‘미래 102’가 완성된 다음에는 현장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데이타만 확보한다면 쉽게 통합생산체계를 만들 수 있게 되어 시간도 짧게 걸렸고 성능도 일정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구소 주장에 의하면 7년 걸릴 작업을 불과 2개월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시간 단축 효과는 1/40 가량이다. 비용도 외국에서 수입할 때에 비해 1/3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2016년 말, 최성의 정보과학기술연구소는 10년 가량 걸릴 수도 있는 15종의 공업용 첨단정보기술제품 개발과제를 100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앞당겨 수행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축하문까지 받았다. 연속 혁명, 다단계 혁명 등을 강조하면서 혁신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를 바라는 북한 지도부의 요구에 충실히 호응한 과학기술자라 할 수 있다.

혹자는 2009년부터 대대적으로 강조하던 CNC에 대한 언급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면서, CNC 기술은 실체가 없고 후계자 김정은 부각효과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는 피상적인 관찰에 의한 것이고 북한의 모든 언론을 실체 없는 선전, 선동으로 치부하는 해석이다. 아마도 북한의 기술발전 정도나 경제발전 정도가 부분적인 설비의 성능을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전체 시스템을 혁신하는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에 CNC에 대한 언급이 줄어든 듯하다. 미래 102처럼 통합생산체계를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일반화, 규격화된 솔루션이 만들어졌고, 통합생산체계를 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현장 소식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 근거이다.


2019년은 변곡점


2019년 북한의 변화는 이전과 다른 흐름이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다양한 경제개혁 조치들의 제도화, 안정화에 힘쓰는 모습도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양적 확산을 넘어 질적 변화를 기대하는 지점도 보인다. 5개년 전략의 중반을 통과한 직후이기에 좀 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듯하다는 기대도 있지만, 혁신의 지점이 바뀌어 통합생산체계를 비롯한 시스템적 접근이 많아졌다는 점과 구체적인 수치들이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흐름을 예상하게 하는 지점이다. 점, 선에서 면, 입체로, 부분에서 전체로 혁신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아직 확정하기는 이르지만, 북한과 미국의 2차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2019년은 북한에게 명확한 변곡점, 변신의 지점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의 교류협력도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전개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결국 북한 경제도, 전체 사회의 시스템도 이전과 명확히 다른 흐름으로 접어들 것이다. 모쪼록 올해 안에는 매번 글로만 예상했던 북한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통일뉴스 글로 직접 가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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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신년사] 다수확농장원은 개인농의 출현 혹은 집단주의의 후퇴인가?


2019년 신년사에 농업과 관련한 지난해 성과를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하였다. 


"농업부문에서 알곡증산을 위하여 이악하게 투쟁한 결과 불리한 일기조건에서도 다수확을 이룩한 단위들과 농장원들이 수많이 배출되였습니다."


농업부문에서 성과가 있었다는 표현과 함께, '개인'을 뜻하는 '농장원'이 거론된 것이다.

이를 두고 북한학 박사이자, 전 통일부 장관까지 지내신 분이


"‘협동농장’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기존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농업 방식에서 생산·분배 단위로서 개인(농장원)은 존재할 수 없다. 집단주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농장, 작업반, 분조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하면서 


"개별 농민이 생산과 분배의 기본단위가 되는 구조적인 농업개혁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공식화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글을 일간지 칼럼으로 올렸다. 


과연 그럴까?


북한이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개개인을 강조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1950년대 천리마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길확실'이라는 작업반장 '개인'을 부각시키면서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전개하였고, 

'로력영웅'이라는 칭호도 있을 정도로 개인에 대해서도 거론한다. 


이번 '다수확농장원'이라는 말은 개인농의 출현이기보다 농업부문의 혁신가, 그것도 다수확부문에서 혁신을 이룬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노동자들 중에서 '혁신'에 성공한 사람을 '로력혁신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들 중에서 '다수확'에 성공한 사람을 '다수확농장원'이라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수확농장원'이라는 말은


2017-05-17 로동신문 기사에 처음 언급되었다. (로동신문 기사 중에서)


"농장일군들은 농장적으로 2개 작업반을 다수확작업반으로, 매 작업반마다 1개 분조를 다수확분조로 선정하였다.그리고 매 분조마다 1명씩 모범적인 농장원들을 다수확농장원으로 내세웠다."


북한의 정책 집행 특징 중에, 모범을 만들고 이를 확산시키는 방식이 있는데 

'다수확'을 위한 모범으로 '다수확작업반' '다수확분조', '다수확농장원'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여전히 농사일은 개인이 아니라 작업반, 분조라는 단위로 진행되고 있다. 홀로 일하는 '개인농'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2017-06-10 로동신문 기사에는 


“증산군당위원회에서는 지난해 분조장사업을 하면서 담당한 포전에서 다수확을 거둔 금송목화전문협동농장 제6작업반 2분조장을 포함한 4명의 다수확농장원들의 사진을 군영예게시판에 게시하여 널리 소개선전하였다.또한 군안의 농촌당조직들에서 350여명의 다수확농장원들과 로력혁신자들을 농장, 작업반영예게시판을 통하여 소개선전하도록 함으로써 대중의 열의를 북돋아주었다.”


라는 언급이 나왔는데, 

다수확농장원과 로력혁신자들이 동급으로 거론되었다. 


2016년 7차 당대회 이후 농업 부문의 가장 큰 목표는 '다수확'이었다. 

그래서 이를 적극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수확농장원'을 앞세운 것이다. 


북한학 박사이면서 전 통일부 장관인 분이 북한의 집단주의, 혹은 노력영웅, 혁신가에 대한 이해가 없었을 리는 없는데, 이런 실수를 한 것은 북한의 변화 그것도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앞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장과 시장체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시장이 등장하면 북한 사회 나아가 경제시스템 전체가 마치 시장체제로 바뀌었다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을 거론하는 모습만으로 북한의 집단주의의 후퇴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싶다. 북한 사회의 개혁, 변화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그리고

최근에는 로동신문, 민주조선을 비롯한 신문은 물론, 경제연구 등의 학술지들도 북한에서 직접 데이타베이스를 만들어 공개하고 있는데 이를 조금만이라도 이용하여 생각을 다듬었으면 이런 실수도 안 했을 듯하다. 


북한이 만든 데이타베이스에서 '다수확농장원'을 검색하면

뉴스에서는 24건, 저널에서는 0건이 검색된다. 

너무 많으면 읽기 힘들겠지만, 24건밖에 안 되니 금방 훑어볼 수 있다. 


예전에야 데이타베이스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사를 직접 읽고, 메모하고, 기억해야만 

어떤 용어, 어떤 개념이, 언제 나왔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비슷한 개념과 용어로 검색만 해보아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데이타베이스는 전 세계에서 남한 내부에서만 쓰지 못하고 있다. 모든 북한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심지어 북한 전공자이지만 이 데이타베이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Posted by woojuri

개성공단에서 남북이 함께하는 스타트업 단지를!



드디어 북한 과학기술울 중심으로 남북 협력, 스타트업 만들기가
한겨레에 실렸네요.
작년 12월 귀국하여 진행한 행사들이 성과가 있었군요. ㅎㅎ

지금까지

1. 북한 과학기술도 쓸만한 게 많다.
2. 북한 노동력, 자원보다 과학기술, 과학기술자를 활용하자
3. 남북이 협력하여 스타트업을 만든다면 일자리+통일이 같이 해결된다.
4. 개성공단에 남북 스타트업을 만들자.

는 이야기를 조금씩 개발하고 계속 이야기해왔는데
개성공단 이사장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시니
조만간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면 실행되겠네.
(신난다^^. 연구자가 할일은 여기까지 일듯. 이젠 정책 실천가들이 많이 붙어서 결실을 거둬야할 때일 듯)

이제 나는
개성공단 문제를 넘어
5. 남북교류협력법과 중소기업벤처 육성관련법을 수정하여
통일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Uni-TIPS같은 법을 만들고.

6. KOTRA등의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북한 기술, 기술상품, 기술주도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체계도 고민 해봐야겠다.
그러면 관련된 기관에서 관심 가지고 실행할 때가 오겠지. ㅎㅎ

그리고 미국 라스베가스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북한 기술, 기술상품, 기술주도 기업
들이 참여하는 박람회(expo)도 열릴 수 있으면 좋겠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781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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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사, 분야별 언급 순서, 특이 사항, 



매년 북한은 신년사를 발표한다. 하지만 북한 연구자들조차 이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 듯하다. 

분석을 한다고 하더라도, 남북 관계나 대외 관계만 보고, 지난 해 평가나 올해 국내 계획 등은 그냥 넘어간다. 

아마도 역대 최대 관심을 모았던 2019년 신년사에서도 비슷하다. 


원론적으로 북한의 신년사는 지난 해 평가와 올해 계획을 총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라 

그냥 무의미하게, 허황된 내용들로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발표한 신년사(2013~)에서 국내 계획에서 밝힌 분야들의 순서를 정리해봤다. 

그랬더니 북한의 변화가 어떤 부분에 집중될 예정인지,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볼 수 있었다. 


언급된 순서가 중요도와 무조건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6년 정도, 시계열로 살펴보면 정책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핵무력 완성 이후, 경제총집중 노선 선택 이후 (2018년 4월 20일 7기 3차 전원회의)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가 되는

'과학과 교육'에 집중한다는 결정이

'인재와 과학기술'을 별도로 거론하였다는 점이다. 

(긴 호흡이 필요하고, 마음 먹는다고 잘 안 되는 부분인데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지난 해 평가와 올해 계획들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은 '통합관리체계, 통합생산체계'인 듯하고

드러난 내용은 '군수공업'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군수의 민수 전환(spin-off)' 프로그램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불과 2~3년 전까지 spin-off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연구자들은 이를 어떻게 평가할 지 궁금하다.)


게다가, 북한의 전력, 식량 문제가 최근 많이 변화된 듯하고 올해 이 부분에 대한 집중이 이루어질 듯하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칼럼과 강연으로... ^^

(2019년 첫 강연은 1월 25일 뮌헨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woojuri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에 대한 잘못된 이해




한호석 선생님의 글은 항상 참신한 지점이 많았는데 이번 글([개벽예감 321] 평양의 밤하늘 수놓은 4차 산업혁명의 불빛, 2018/11/05)은 아쉬운 점이 많다. 

북한의 과학기술, 기술혁신 등에 대한 이야기에서 약간씩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부분이 두드러져서 여기서나마 의견을 남긴다. 


북한의 국방력(미사일, 핵 등)이 뛰어난 배경으로 과학기술 중시정책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편다고 해서 국방력이 항상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편다고 경제가, 기술혁신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북한의 예상외로 발달한 국방력을 보면서, 북한의 경제도 당연히 발전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당연한 것일까? )


이번 글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1957년부터 1966년까지 10년 동안 조선의 과학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조선의 산업 전반이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되어 세계경제발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초고속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조선에서 ‘천리마운동’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북이 처음으로 장기간에 걸친 과학기술발전계획을 수립한 것은 1957~1966년 기간에 대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것과 1956년 12월에 시작된 천리마운동은 상관이 없다. 이 당시 천리마운동은 약간 우발적으로, 즉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1957년부터 시작되는 첫 장기 경제발전계획인 1차 5개년계획을 코앞에 두고 소련에서 원래 약속했던 지원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물론 1957~1958년 사이에 성과들을 잘 추스려 1959년부터 진행한 천리마작업반운동은 준비해서 진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을 만들던 초기에는 소련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1956년 11월부터 약 두 달 동안 북한을 방문한 소련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비로소 초안 작성작업이 시작되었고 작성이 마무리된 계획의 초안은 1957년 9월부터 약 두 달 동안 북한 과학원 지도부가 직접 소련을 방문하여 검토 받았을 정도였다.


1957년부터 시작되기로 계획되었던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계획은 소련과 북한의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1957년 말부터 재검토에 들어갔다. 

결국 원래 계획기간의 초기 몇년은 계획 자체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계획과 실행은 당연히 상관성이 많이 떨어진다. 


또 이 당시 북한의 경제발전은 과학기술/과학기술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결과이긴 하지만, '산업 전반이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되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1950년대 말, 북한 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다양한 원인에 의한 결과이겠지만,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북한 산업 전반을 변화시킨 결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이에 대한 연구가 별로 진척되지 않았다. (2007년 2월 내가 받은 박사학위 주제가 이에 대한 것인데 내 박사논문 이후에 더 깊이 파들어간 연구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다만 이 시기에,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의 가능성을 보였던 것 같고, 이에 기초한 구체적인 정책들이 마련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북한 지도부는 이런 전략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한호석 선생님의 이번 글에 있는 다음 문장도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957~1967년 과학발전 10년 계획’이 ‘천리마운동’으로 수행되었던 것처럼, ‘2012~2022년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도 ‘만리마속도창조운동’으로 수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기계획-천리마/만리마

의 유비관계는 약간 무리한 댓구(?)라 할 수 있다. 


참고하시라고,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10년 전에 쓴 논문 한 편 첨부합니다. 


“제10장 북한의 현장중심 과학기술정책의 형성과정: 일본과 소련의 영향에서 독립하기”, 󰡔한국 현대 과학기술의 사회사 연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06), 174-190쪽.


강호제-북한의 현장중심 과학기술정책이 형성되는 과ᄌ


Posted by woojuri
"새 세기 산업혁명", "새 세기 교육혁명"에 이어 "새 세기 경제구조"까지 등장하였다.

살짝 DB에 검색해봐도 "우리 경제구조"는 있는데, "새 세기 경제구조"라는 말은 아직 안 보인다.

소위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새 세기'라는 말이 경제구조에도 붙는 것으로 보아, 경제 부문의 정책들이 많이 다듬어진 듯하다.

혹시 궁금한 사람은,
"[론설] 당의 새로운 전략적로선관철에서 나서는 중요한 요구 - 로동신문 2018-10-29"을 참조하시라.
(구글 신에게 물어보고 저장된 페이지를 보면 된다)


Posted by woojuri

독일의 한국학 전공 대학원생들과 북한사 수업을 시작했다. 첫 시간에 북한에 대한 이미지, 북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백두산, 판문점, 장마당, 아리랑 이런 말이 나왔다. 
핵무기, 미사일, 전쟁, 독재, 주체, 식량난 등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다. 
내가 이런 말들을 유도하려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했다. ㅜㅜ

불과 1년이지만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뀐 듯하다.

정세나 상황, 그리고 대중들의 인식은 많이 바뀌고 있는데, 
정작 통일/북한 관련 연구나 정책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논리나 명분은 점점 없어지고, 정책 입안자(?)와 친소관계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깊어진다.

조금은 더 깊은 안목을 가지고 토론하고 미래를 가꾸어가면 안 될까?


Posted by woojuri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1229,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에 비추어보면 화학연구소에서 담당하기로 했던 금속학과 기계, 전기, 건설 부문 등의 비중이 매우 커질 것이므로 별도의 연구소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우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여건이 되겠습니까? 이번에 8개 연구소를 내오는 것만으로도 아주 힘들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요.”


이 부분은 화학연구소 조직 구성에 대해 논의할 때 이미 결론이 난 것 아닌가요? 과학원에서는 물리,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생산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는 각 생산성 산하 연구소들에서 수행하기로 당시에 원칙을 정했습니다. 다만 분야들 사이의 연계를 위해 화학연구소 안에 작은 연구실 정도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지요.”


그렇지요. 과학원 안에 별도의 연구소를 두어 공학연구를 수행하게 되면 조직 구성원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과학원과 생산성 산하 연구소의 구분이라는 기본 원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시만요, 그 조직 구성원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련의 조직 구성원리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선진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것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우리 조선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우리나라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업 부문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자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기술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현재 과학원 조직 구성을 보면 이 부문이 너무 약합니다.”


맞습니다. 전국의 생산현장, 특히 산업현장에서는 과학기술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인데 이를 생산성 산하 연구소에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이죠. 중앙 과학기술 기관인 우리 과학원에서 이를 적극 책임져야 합니다. 특히 열악한 상황에서 제대로 일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잘하여야 하는데, 공학부문에 대한 과학기술 연구역량을 과학원에 집결시키는 편이 더 좋겠다는 겁니다. 소련식의 창조적 적용인 셈이죠.”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북에서 일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이후 소련쪽으로 바뀌었다. 북 주둔군으로 소련군이 들어왔고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도부가 새롭게 들어섰기 때문에 소련식이란 절대적 기준이었다. 이후 1950년대를 거치면서 북 지도부는 독자노선을 강력하게 추구하기 시작하였지만 정치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제대로 독자노선의 내용이 채워진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정치에서 북이 소련식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1956년경, 15개년계획을 입안할 때부터라고 하지만 제대로 자주, 자립, 자위, 주체라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은 1965년경이다.


과학기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 북에서 대학을 설립, 운영하고 과학연구기관을 세우는 데에 소련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소련으로부터 받은 4만 여 권의 책과 각종 실험도구 2600여 점, 도표 2200여 점은 김일성종합대학 기틀을 잡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1948721일에 파견된 소련학자 일행은 대학운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세계적인 생물학자 오파린(A. I. Oparin)을 단장으로 하는 소련학자 일행은 석 달 동안 머물면서 각종 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각 대학의 실험기구 설치 및 교수강령 작성을 도와주었다. 게다가 1952년 과학원 설립 초기에 과학원의 이름을 과학 아카데미라고 부를 정도로 소련 과학원을 공식적으로 모델로 삼았다. 처음에 의학부, 농학부, 공학부까지 포함하여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이 이후 이들 학부를 단과대학으로 독립시켜 기초연구 중심의 종합대학과 응용과학 중심의 단과대학 체계로 바뀐 것이나 전문 연구활동 중심의 과학원과 기술지원활동 중심의 생산선 산하 연구소로 과학연구기관이 이원화된 것도 모두 소련식을 모방한 결과였다.


이처럼 소련식을 그대로 모방하던 과학기술계 분위기가 자립화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52년 말이었다. 전문 과학연구활동을 담당할 과학원 산하에 공학연구소를 설치한 것과 생산 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과학원이 계속 참가한 것은 북 현실에 맞는 과학기술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그런데 북이 소련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말부터였다. 소련의 도움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작성하고 있던 과학발전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소련 정부도 1957년 말부터 과학기술 지원단을 철수시킨 뒤 더 이상 파견하지 않았다. 북 지도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과학원 구성원들을 생산현장으로 직접 파견하여 현장에서 커지고 있던 기술지원활동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로 하였다. 이는 현지연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어 19581월부터 시행되었다. 다른 영역과 달리 과학기술계의 독자노선은 1950년대 말에 이미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과학기술 활동의 독자노선화는 세계 과학기술계의 흐름과 동떨어져 뒤쳐질 수 있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다른 나라와 활발한 교류협력을 통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랜 기간의 봉쇄정책 속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핵시험과 인공위성 발사시험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자체적으로 개발, 보유할 수 있게도 하였다. 비록 다른 부문의 희생이 더 컸겠지만.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있으므로 섣불리 맞고 거름을 판단내리기 어렵지만 이런 것이 다른 나라와 다른 북 과학기술 정책의 특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Posted by 세상일기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4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이번 대회기간 동안 토론을 활발하게 진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깊이 토론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흩어져있는 과학기술자들이 한 데 모여 집체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과학원을 설립할 방안을 더욱 구체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국가계획위원회의 과학연구국이 과학기술 정책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기술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되고 다른 기관들과 협력해서 일하기에도 부적절한 상태입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과학기술자들을 한 데 모여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인 과학원을 별도로 세워야겠습니다.”

 

실 과학원과 같은 중앙집권화된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세우자는 김일성의 제안은 처음이 아니었다. 19472월에 설립된 북조선 중앙연구소가 첫 시도였는데 실제 연구를 담당할 과학기술자가 부족하여 6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5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과학기술자를 확보하여 당시 구상을 실현할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판단이 섰기에 김일성이 다시 한 번 과학원 설립을 제안했다.


이번 제안에서 김일성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소련 과학원이었다. 195257일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할 때까지 과학원의 이름은 소련 과학원의 이름을 그대로 베낀 조선과학아카데미였는데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개원할 때 비로소 과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조선 중앙연구소는 일제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꾸려졌던 반면, 새로 설립되는 과학원은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소련식 과학연구기관으로 만들어졌던 셈이다. 소련의 과학기술 체계는 교육기관부터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합대학과 분과별 대학이 분리된 것처럼 과학원은 전문연구활동을 담당하고 분야별 기술지원활동은 각 생산성에 설치된 연구소들이 담당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설립 초기 과학원은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활동은 염두에 두지 않고 국가적 단위의 연구활동에만 매진하는 형태로 계획되었다.


과학원은 과학기술 관련 모든 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우리로 치면 행정기관인 과학기술부, 연구기관인 정부출연연구소, 교육기관인 KAIST, 원로 과학기술자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을 통합시킨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과학원 창립 당시 분야별 중심 과학기술자들에게 원사, 후보원사의 칭호를 부여했고 3개의 부문별 위원회(자연 및 기술과학/의학 및 농학/사회과학)을 꾸렸으며 모두 8개의 연구소(물리수학/화학/의학/농학/역사/물질문화사/경제법학/조선어·조선문학)를 설치했다. 원사의 80% (8/10), 후보원사의 60% (9/15)가 월북한 사람들이었을 정도로 지난 시기 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했던 다양한 노력 중에서 월북유도사업은 가장 효과적이었다.


북은 소련의 과학원을 그대로 베끼고 따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과학원의 경우 설립 초기부터 북의 스타일대로 변형되었다. 우선 기술지원활동을 생산성 산하 연구소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과학원이 직접 생산현장에 뛰어들어 현장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 집행해나갔다. 이는 이후 현지연구사업이라는 독특한 북의 과학기술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소련 과학원에 없는 공학연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는데 이는 학술적이고 원론적인 연구에만 치중하지 않고 현장 중심의 실용적인 연구에도 집중하려던 의도였다. 기초과학을 강조하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응용과학을 강조하는 북 스타일이 생겨난 흐름이었다. 특히 북 방식의 변용인 공학연구소1950년대 말 15개년계획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성과(비날론, 염화비닐, 합성고무, 코크스 없는 제철법 등)를 내면서 북 지도부가 독자노선, 자립경제노선을 추구하는 데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에 설립된 과학원은 이후 3년 동안 내실을 다져 본격적인 경제발전 계획이 추진된 1957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북 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과학기술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리마운동이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단순한(혹은 무식한?) 노력동원식 대중운동이었다는 평가는 이러한 과학기술계의 움직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원은 196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과학원은 과학기술계만으로 재조직되었고 의학, 농학, 사회과학 등 다른 분과들은 독립하여 별도의 과학원 체계를 구성하였다. 오늘날 과학원은 예산편성권까지 확보하여 과학기술 활동과 관련한 모든 권한을 갖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과학기술, 특히 국방과학기술을 앞세운 경제발전전략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가과학원과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기술 담당)의 활동은 북 경제활동의 최중심에 있다





Posted by 세상일기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수 있게 만들어줍시다.”


저를 높이 평가하여 이런 큰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여기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이 이곳 담양으로 내려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아직 많습니다. 게다가 제 식구들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도 과학기술을 홀대하면서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미군정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북에서는 인민위원회 차원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갑시다.”


북도 남도 모두 제 조국입니다. 여기서도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일들이 많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벌여놓은 일들도 아직 많습니다. 제가 갈 생각이었으면 저번에 려경구 선생이 올라갈 때 벌써 따라 나섰겠지요. 미안합니다.”


리 선생, 우리는 선생의 재능과 이상을 높이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생의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조선이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선생의 식솔은 물론 제자들도 함께 오세요. 과학기술적 재능을 가지고 우리와 이상이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여건이 안 되는 이곳에서 선생과 제자들의 재능을 썩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합시다.”


미안합니다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생각을 충분히 해보시되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들어 드릴테니...”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 발전 없이 경제가 발전할 수 없는 사회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일제 식민 지배를 받은 조선에는 과학기술 발전을 담당할 과학기술자가 태부족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 조선인이 과학기술 관련 교육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식민 조선 내에는 과학기술 관련 교육기관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학제를 이상하게 비틀어 조선인이 일본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교묘하게 민족적 차별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인에게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45년 해방 당시 남북 통틀어 대학을 졸업한 고급 과학기술자는 4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북에 남아 있던 고급 과학기술자는 10여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북 지도부는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시간도 짧게 걸리고 효과도 큰 이남 지역에 머물고 있던 고급 과학기술자들을 북으로 유치하는 사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과학기술자 월북 유도사업은 포섭대상자와 친분이 있는 고급 과학기술자가 직접 내려와 실행하였다. 그들은 북 최고 지도자의 위임장을 갖고 다니면서 각종 지원 제안의 담보로 활용하였다. 대부분의 고급 과학기술자들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고 지도자의 약속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과학기술 연구 활동은 자원도 충분히 확보되어야 함은 물론 자금과 인력도 많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중앙 차원의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 대한 보장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라도 김일성의 위임장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자들은 대학 교수 직책을 상당히 선호하면서 연구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실험실 혹은 시험장을 갖고 싶어 했다. 당시 월북 과학기술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북 지도부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여기서 분화해 나온 평양공업대학과 사리원농업대학, 평양의학대학을 일찍부터 만들어나갔다. 1947년에는 흥남화학공업대학을 새로 설립하기까지 하였고 대학의 초기 교수진 중 상당수가 월북 과학기술자로 채워졌다.


또한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게는 풍족한 생활환경을 보장해주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안전한 후방으로 먼저 이동시켜 주었다. 또한 전쟁 시기에도 연구가 중단되지 않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선이 휴전선 근처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1951년 중순부터 대학을 비롯한 각종 연구기관 및 연구기관들은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1952년에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과학기술 연구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북 최대, 최고의 과학기술 관련 조직인 과학원이 설립되었다. 이때까지 중단되지 않고 수행되었던 연구들은 1950년대 말에 꽃을 피운다. 당시 경제성장 속도를 더욱 높여주었던 다양한 기술혁신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이러한 다양한 지원책을 앞세운 월북 유도사업은 남의 배척력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미군정청은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대학교수들을 배제하기 위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는 서울 시내에 소재하던 각종 단과대학들을 묶어 서울대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교수 재임용 심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교수들을 대거 탈락시켜버렸다. 또한 중앙 차원에서 과학기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도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연구 설비가 잘 갖추어져 있던 서울 공대 실험실을 미군정에서 사용한다는 짧은 통보만으로 며칠 만에 빼앗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설비와 기록들이 유실되기도 하였다.


남의 척력과 북의 인력이 잘 배합된 결과, 북은 상당수의 고급 과학기술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 끈질기게 진행된 월북 유도사업을 계속 거부하던 리승기도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대  7월에 서울에서 남으로 피난가지 않고 결국 월북 대열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까지 함께 데리고 월북하였다. ‘리승기 세력의 월북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학공업 분야의 최고 엘리트 과학기술 집단의 월북은 일제가 건설해두었던 각종 화학공업 설비들을 제대로 가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해방 전 여순공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해방 직후 스스로 귀국하여 경성대 물리학과를 정상화하는 데 앞장섰던 도상록 역시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북 물리학계를 이끌었다. 북에서 핵관련 연구와 반도체 연구 등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월북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리승기나 도상록 등과 같이 학문 내적인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도 있었고, 과학기술 정책과 경제 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데 핵심적인 일을 수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북이 일찍부터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과학기술적 내용까지 잘 아는 과학기술자들이 정책의 이해도나 기획력, 추진력이 높았기 때문에 중히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강영창, 김두삼, 오동욱, 로태석 등이다. 이들은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화학공업상 등을 역임하였다. 북 경제 성장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던 시기, 경제의 핵심 분야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월북 과학기술자, 그것도 대학 졸업 수준 이상의 과학기술자 수는 111명 정도이다. 인원수가 불과 4~5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 결과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될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를 일컫는 원사칭호를 받은 사람 10명 중에서 8명이 월북한 사람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높은 칭호인 후보원사를 받은 15명 중에 9명이 월북한 사람들이었다. 북 과학기술계 최고 원로 대부분이 월북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북 과학기술계는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초석이 놓여 졌고 그들에 의해 고등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이 정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까지 않은 결과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북의 과학기술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고 비날론, 염화비닐, 갈섬유, 무연탄 가스화, 함철콕스, 합성고무 등을 공업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발전전략이 수립되고 실행될 수 있었다





Posted by 세상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