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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11-2월호) 북 화학공업의 중심지, 함흥화학공업도시의 형성

(민족21 2011-2월호) 북 화학공업의 중심지, 함흥화학공업도시의 형성

1960년 9월 1일, 비날론공장이 건설되고 있던 함흥시에서 ‘비날론 공장 건설 관계부문 열성자 회의’가 열렸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비날론 공장 건설을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될 1961년 9월 이전에 완성하기 위한 대책모임이었다.

비날론은 리승기가 일제시기에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북에서 공업화에 성공한 합성섬유이다. 리승기가 월북할 한국전쟁시기까지는 비날론을 공업화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북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에 대규모 비날론 공장이 완공될 정도로 비날론 공업화 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비날론 공업화 연구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부터 일산 20kg(연산 80t)짜리 중간공장을 건설하는 것으로시작되었다. 이 중간공장은 1954년에 완성되었고 1957년에는 일산 200kg(연산 800t)짜리로 규모가 커졌다. 정식공장을 건설할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그 규모를 연산 1만톤으로 하려던 계획은 1959년에 접어들면서 연산 2만톤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는 1958년부터 시행된 현지연구사업의 결과로 북 과학기술계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활동 규모가 급격하게 커졌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공식회의 개최 이전에 리승기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과 사전 회의를 개최하면서 회의 진행과 내용을 다듬고 있었다.

 

“작년에 우리는 비날론 공장의 규모를 1만톤에서 2만톤으로 늘렸습니다. 천리마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우리 경제발전 속도가 이전과 다르게, 말 그대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접하고 공장의 규모를 세계 최대 수준으로 늘려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공장건설 속도가 예상보다 뒤처지고 있습니다. 이제 당대회가 불과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리승기 박사, 전망이 어떤가요?”

“기한 내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날론 공장 건설 현장에서는 매일 신기록이 작성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획의 200%, 300% 초과달성은 우스운 일입니다. 비날론 일군들은 최소한 500%, 대략 1000%는 되어야 초과달성이라고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래서 ‘비날론 속도’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요. 현재 비날론 공장 건설 계획은 2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장의 최종 규모는 2만톤 규모이지만 내년까지는 1만톤 규모의 설비만 우선 완성하고 이후 이를 그대로 본떠 1만톤 규모를 더 증설하는 겁니다. 설비 건설을 2단계로 나눈다하더라도 기초공사는 2만톤 규모에 맞게 진행해야 하므로 지난 1년간 공정의 진척이 약간 더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진행했던 대규모 공업화 연구도 거의 끝냈으므로 이제부터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양에 있는 과학원과 이곳 함흥지역을 오가면서 연구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제가 보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공장건설이 진행되면 평양에 있는 화학공업 관련 과학자, 기술자들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질 텐데, 평양과 이곳 사이의 거리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네, 그래서 이번에 저희 과학자들도 건의를 하나 제기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평양에 있는 비날론 관련 연구소와 연구인력들을 모두 이곳 비날론 공장 주변으로 옮겨 올 수 있을까요? 어차피 저희 연구는 연구소 단계를 넘어 공장 건설 단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이 이곳에 내려와 있는 상황이니까요.”

“괜찮은 생각입니다. 연구와 생산을 함께 진행하기 위해 지난 1958년부터 시작된 과학원의 현지연구사업이 상당히 효과가 좋았는데 이를 좀 더 체계적, 상시적으로 진행하는 셈이니까요.”

“비날론 연구와 관련한 일종의 상시 현지연구기지를 이곳에 건설하는 것이죠.”

“좋은 생각입니다, 리승기 박사. 그런데 일은 통크고 대담하고 진행해야 합니다. 이곳으로 비날론 관련 연구소만 옮겨올 것이 아니라 아예 화학공업 관련 연구기관을 모두 옮겨오도록 합시다.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화학공업 관련 생산시설들이 이곳 함흥시에 모두 모여 있는데 연구기관만 과학원 본원이 있는 평양에 몰려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 평양에 앉아서 연구하는 것보다 화학공업 기지에 화학실험실이나 화학연구소들을 설치하고 화학부문 과학자, 기술자들이 자기의 연구사업을 직접 생산과 결부시켜 진행할 수 있는 그들의 전당을 여기에 건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 함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학공업도시가 되겠군요. 화학공업과 관련된 공장은 물론 연구소와 학교가 모두 몰려 있는 대규모 현지연구기지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한 가지 염려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도 비날론 공장 건설과 관련한 지도기관이 여러 곳이라 혼선이 생길 때가 많은데 규모가 더 커지면 혼란이 더 커지지 않을까요? 자칫하면 따로 있을 때보다 일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 문제는 원칙이 명확합니다. 화학공업 관련 사업은 철저하게 과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현지연구사업의 원칙처럼 과학원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따라서 새로 생기는 함흥은 과학원에서 지도하는 쪽으로 체계를 짜야 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비날론 공장 건설 관계부문 열성자 회의’에서 김일성은 함흥에 과학원 함흥분원을 세우고 함흥시를 ‘화학공업도시’로 발전시킬 것을 제시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연설에서 함흥을 중심으로 화학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걸리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는데 하나는 화학공업 기지 전체를 지도할 알맞은 ‘영도체계(지도체계)’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학연구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연구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함흥분원 건설 계획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대안이었다.

당시 함흥에는 각종 화학공업 관련 시설들이 이미 많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함흥을 화학공업도시로 만들기가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할 수 있다. 북의 대표적인 화학공업시설인 본궁화학공장, 흥남비료공장이 일제시기부터 이곳에 설립되어 있었고, 룡성기계공장, 흥남제련소, 흥남17호공장, 흥남제약공장, 흥남질안공장, 본궁연료공장, 염화비닐공장, 홍상요업공장, 함흥건구공장, 함흥가구공장, 함흥콩크리트 공장 등도 해방 이후 이미 건설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화학공업대학, 동력대학 등과 같은 교육기관들도 있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있던 화학공업 관련 연구소만 이곳으로 이전하면 화학공업 관련 기관이 모두 모이게 되는 셈이었다. 당시 흥남에는 중공업위원회 산하 화학공업연구소 흥남분소만 있었고 과학원 산하 연구소들은 대부분 평양 근교에 있었으므로 생산현장과 연구기관 사이의 지리적 분리현상이 매우 심한 상황이었다. 함흥분원을 건설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들이 리승기를 비롯한 과학기술자였던 이유는 당시 상황에서 생산현장과 연구기관의 분리로 인해 제일 심각한 불편을 겪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함흥분원 건설결정이 내려진 바로 다음 해에 과학원 산하 화학연구소와 중앙분석소가 바로 함흥으로 이전하였고 중공업위원회 산하 화학공업연구소 흥남분소가 철거되고 본 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1961년에 신속히 세워진 함흥분원은 1964년에 무기화학연구소, 유기화학연구소, 고분자화학연구소, 중앙분석소로 연구소체계를 재편하였다.

1960년 9월 1일 회의에서 김일성이 제기한 첫 번째 문제인 ‘영도체계(지도체계)’와 관련해서는 과학원 조직체계를 조금 수정하여 과학원이 직접 함흥화학공업도시를 지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화학공업관리국이나 화학공업성을 함흥에 직접 설치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당중앙위원회에서 토의한 결과 함흥화학공업도시를 과학원 아래에 두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과학원의 주도로 과학기술계가 적극 경제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던 1950년대 말 당시의 상황은 사상적인 문제로 과학기술자들을 불신하던 기존의 흐름을 조금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함흥에 집결할 연구소가 3개밖에 되지 않지만 ‘과학원 분원’이라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이들 연구소를 묶은 이유가 바로 함흥화학공업도시 전체를 과학원이 직접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함흥화학공업도시가 생산시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지만 그 실질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과학연구기관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함흥시의 활동이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과학기술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함흥화학공업도시의 지도체계와 도시구성을 종합해 보면 함흥분원은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거대한 현지연구기지로 건설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생산 시설이 있는 특정한 공장에 현지연구기지를 임시로 건설하는 것이 ‘현지연구사업’이므로 함흥화학공업도시는 사업 규모를 도시 전체로 확대한 형태였던 것이다. 함흥화학공업도시 건설계획은 여러 생산시설들이 대규모 단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영구적인 현지연구기지를 대규모로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현지연구사업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지도체계에서 우위에 있도록 배려한 것까지 고려하면 당시 북 과학기술계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현지연구사업이 함흥분원을 중심으로 함흥화학공업도시를 조직하는데 기본틀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학기술 연구는 생산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즉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어 연구 결과가 실제 생산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옛 소련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고 과학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소련경제가 무너졌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북의 경우는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즉 과학연구와 생산이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 과학기술정책이 개발되었다. 함흥분원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연구도시를 표방하면서 기초과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평성에 조성된 ‘평성과학원도시’와 ‘함흥분원’ 설립과정을 비교해 보면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달리 북은 처음부터 연구와 생산의 결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정책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같은 시점에 설립 결정이 난 ‘평성과학원도시’의 경우, 거의 10년 이후 본격 착수에 들어갔고 거의 20년이 걸려 대략적인 완공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현지연구사업 시행 이후,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절대적 여건이 부족해져 불만이 높아진 과학자들의 요구로 채택된 ‘평성과학원도시’ 건설계획은 정부 지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사업 진척이 매우 더뎠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 지도부는 ‘연구와 생산의 밀착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연구가 생산활동에 직접적으로 결합되는 정도가 중요하므로 ‘밀착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대 과학기술정책의 트렌드를 쫓은 것이 아니라 북 과학기술정책의 전통을 재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신년 공동사설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