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15.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115, 김일성은 기양기계공장에서 트랙터 시제품 조립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기양기계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양기계공장(‘금성뜨락또르공장의 전신)은 원래 간단한 농기계를 생산하던 농기계제작소였지만 협동농장들의 기계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6년부터 기계공장으로 확장하면서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노력하던 곳이다.


김일성의 전화에 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이 응답했다. 그는 희천공작기계공장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트랙터 생산 책임을 맡으면서 기양기계공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기사장 동무, 드디어 트랙터 조립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시운전은 해봤나요?”


! 그런데 민망하게도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갔습니다.”


? 뒤로 갔다구요? 하하하, 그래도 가긴 가는군요. 됐습니다! 일단 뒤로라도 갔으니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시운전 후 분해해서 살펴보았는데 전진과 후진을 갈라주는 부품 하나가 반대로 되어서 돌려 맞추었습니다. 이제 다시 조립해서 시운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요,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는 성공한 셈이네요. 그래, 앓는 동무들은 없습니까?”


모두 사기충천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동무들은 기술신비주의와 보수주의를 물리쳤기 때문에 자체의 힘으로 뜨락또르를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뜨락또르가 다 되면 나한테 직접 몰고 오세요.”


수상님! 저희들은 누가 먼저 첫 뜨락또르를 몰고 수상님께 달려가겠는가 하는 구호를 내걸고 투쟁했습니다.”


좋습니다. 전체 노동자들에게 나의 인사를 대신 전해주세요.”


 

자체 생산 1호 트랙터인 천리마호19581114일에 시제품 생산이 완성되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북에서는 굴착기(1021, 락원기계공장), 오토바이(1117, ‘천리마호’), 화물자동차(1118, ‘승리호’, 덕천기계공장), 불도저(1219, ‘붉은별호’, 북중기계공장) 등이 자체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들 첫 생산품들은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 소련제 생산품을 토대로 역설계(Reverse-Engineering) 방식으로 생산한 것이었다. 실물을 분해하면서 각종 부속들을 그대로 복제하여 다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트랙터의 경우 처음에 소련의 아떼즈라는 구형을 모델로 삼으려다가 김일성이 직접 최신형 유또스를 수입해주어 이를 토대로 생산된 것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 트랙터를 2대 구입해 주었는데 한 대는 분해하면서 부품 복제하는 데 쓰고 나머지 한 대는 이후 조립할 때 쓰기 위함이었다.


당시 트랙터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한 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자 집단이 부상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록 사상성은 부족하지만 과학기술적 재능 때문에 우대받던 오랜 과학기술자들을 제치고 사상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겸비한 새로운 과학기술자들이 이 당시부터 과학기술 활동의 핵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당시 트랙터 생산을 맡았던 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은 북의 첫 기술전문학교인 평양공업전문학교(교장 신건희) 1회 입학생으로 1기 소련유학생에 뽑혀 소련의 우랄공대에서 공부하고 1953년에 귀국한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과학기술자들의 현장활동이 강화되면서 과학원 지도부도 1130일에 붉은 과학기술자로 불리던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었다.


또한 이처럼 엔진을 장착한 중기계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북의 경제발전 정책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제 시기 북측 지역에는 남측 지역에 비해 공업 관련 시설들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유독 기계기구공업만 남측 지역에 더 많이 건설되었다. 즉 전체 공업 시설 중 대략 80% 이상이 북측에 집중되어 있었던 반면 이를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부문인 기계기구공업만 따지면 20%가 채 되지 않았다. 공업 부문간의 불균형, 특히 기계기구공업의 미비함은 북측 경제가 정상화되는 데 큰 걸림돌이었기에 10여 년 간 북한 지도부가 집중 육성했고, 그 결과 비록 자체 설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밀 기계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후 북한 지도부는 이 분야 육성을 위해 20여 년 간 더 노력한 결과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또 다시 20여 년이 지난 뒤에는 인공위성까지 자체적으로 제작, 발사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인공위성 제작, 발사 기술은 기계공업이 상당히 발전해야만 가능한 것인데 지난 4월 인공위성 시험 발사는 수십 년 간의 노력 끝에 거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인공위성 시험발사와 관련하여 발사 성공 여부나 그 정치, 외교적 의미를 분석하는 데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인공위성과 관련한 기술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북 경제의 앞날을 예측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적다. 북이 관련 기술들을 군수용으로만 묶어두지 않고 민수로 전환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게 되면 북 경제의 발전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북의 민수전환 의지와 활동은 각종 신문 기사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새롭게 구성된 국방위원회에 군수담당자들이 추가된 것도 이런 흐름에서 분석한다면 민수 전환 정책의 강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