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북동향 브리핑(이대 통일학연구원)

2002년 신의주특구와 2010년 북중관계 (2010년 11월 01일 ~ 2010년 11월 07일 )

2002년 7월에 새로운 경제조치가 발표된 직후인 2002년 9월에 북한은 신의주 특구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끝내고 강성대국 건설 구상을 구체화시키면서 마련한 경제발전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당시의 조치들도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이 상해 등을 방문한 다음 발표된 것이라 중국의 지원 약속이 있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2002년 10월 초, 초대 신의주특별행정구 장관으로 임명된 양빈이 중국 공안에 의해 긴급체포됨에 따라 신의주 특구를 시작으로 진행하려던 경제발전계획은 급제동에 걸렸고 전면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양빈의 석방을 촉구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초에 상당히 멀어졌다가 다시 좋아지려던 북중관계는 다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제임스 켈리 국무부차관보의 방북 이후 촉발된 2차 북미 핵분쟁은 북중관계를 적당한 거리에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북한과 중국은 올해 김정일 위원장의 두 차례에 걸친 방중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져서 거의 50년 만에 최고 수준에 도달한 듯하다. 이번에는 2002년과 달리 중국의 호응이 상당히 적극적이고 선차적이다. 2002년 당시는 북한의 필요성만 부각되었지만 이번에는 북한과 함께 중국의 필요성이 훨씬 많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번 관계 회복은 혈맹관계의 회복이라고 거론되는 만큼 당분간 이런 관계는 지속될 듯하다. 이미 군사협력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들이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던 북한의 입장에서 2002년은 충격의 한 해였을 것이다. 북중관계와 북미관계를 원활하게 만듦으로써 경제발전에 집중하려던 북한의 구상이 완전히 흐트러졌던 것이다. 양빈사건을 계기로 북중관계가 나빠졌고, 켈리의 방북 이후 부시정부는 2차 핵분쟁을 시작하여 북미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졌다. 2000년 북미 코뮤니케를 마련하던 긍정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후 북한은 다시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2009년을 기점으로 발사체와 핵탄두 개발에 모두 성공하였다. 핵무기 보유를 기반으로 다시 북중, 북미 관계를 정상화를 요구하면서 중단되었던 경제발전 전략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 북한의 상황이다. 북미관계는 여전히 어렵지만 북중관계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 듯하니 2010년이 2002년보다 훨씬 상황은 좋다고 볼 수 있다. 만일 2002년 당시 양빈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김정일의 상해구상이 중국의 협력을 바탕으로 실행에 옮겨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CNC를 비롯한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경제수준의 일대혁신(단번도약, 연속비약)을 꾀하고 있는 흐름은 2002년 이후 8년동안 막혔던, 혹은 지체되었던 흐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