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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23.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학자들이 당정책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의도를 똑똑히 모르고 있으며 그들 속에서 우리 당의 사상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좋지 못한 현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인테리들 가운데는 항일빨지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소설 보듯 한번 훑어 읽으면 다 알 수 있는데 무엇을 자꾸 연구하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상기를 학습하라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 혁명가들의 풍모, 그들의 사업방법과 사업작풍, 혁명가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배워 그것을 자기의 뼈와 살로 만들며 자신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라는 것입니다.”


 

위의 말은 김일성이 1967년에 한 발언이다. 그는 지식인(인테리)들 속에 이기주의, 소부르조아 사상이 남아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인테리들을 노동계급화, 혁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비판의 대상에 과학기술자도 포함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당시까지 누구보다도 앞장서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일성이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지식인 전체를 불신한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힌 대목이다. 과학기술 정책이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대폭 뒤로 밀리는 순간이었다.


김일성의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불신은 1982년까지 바뀌지 않았다. 당시 과학기술 부문 일군들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토의하면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단지 과학기술자들이 편안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수준을 넘어, 과학기술자들이 연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강한 불신을 여전히 갖고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어느 해인가 내가 과학원 함흥분원을 현지에서 지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청사복도로 걸어가면서 방안을 들여다보니 과학자들이 모두 책을 보고 있기에 리승기 동무에게 과학자들이 책을 열심히 보는 것 같은데 늘 그런가고 물었습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지만 과학서적을 보는지 소설책을 보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이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과학원 함흥분원에 숱한 과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연구하여 내놓은 것이란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김일성이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갖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675월에 있었던 박금철, 이효순 사건때문이다. 이 사건은 김일성의 리더십에 직접 저항한 1956‘8월종파사건이후 가장 큰 종파사건으로 북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허석선이라는 당 과학교육부장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는 과도기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나오도록 방치했으며, 교육부문사업을 지도하면서 당의 정책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며 제멋대로 집행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즉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지식인 전체를 담당하는 당 과학교육부장이 종파사건의 핵심 가담자로 밝혀졌기 때문에 그가 담당했던 정책 전반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자들의 사상성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현대 과학기술 활동은 개인이 소규모로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여러 사람의 협동작업이 필요하고 막대한 자금과 자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거대 과학(Big Science)'라고 부른다. 이러한 거대 과학기술 활동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지도자들의 정책적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1960년대 초, 북 과학기술계가 다양한 성과를 거두면서 경제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방 직후부터 꾸준히 과학기술 우대정책을 추구한 김일성의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1967년 또 한 번의 종파사건을 계기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우대는 사라지고 과학기술자를 비롯한 지식인 전반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은 15년이 지난 1982년까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진 듯하다. 결국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지원도 대폭 줄어들어 1970년대에는 2가구가 한 집에서 살게 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더욱이 과학기술 연구도시로 만들려던 평성 과학원도시는 완공 목표로 잡은 1970년대를 훌쩍 넘은 1980년대 말에 가서야 겨우 완성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지원을 최고 지도자 개인의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거대 과학이 되어버린 현대 과학기술은 연구활동 자체뿐만 아니라 정책 차원도 개인 수준을 넘어섰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김정일은 1980년대 중반부터 과학기술 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전 시기 과학기술자들을 소홀히 대했다고 반성하면서 과학기술 우대정책을 적극 도입하기 시작한다. 김정일이 김일성 시기 정책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반성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1988년부터 시작된 1차 과학기술발전 3개년계획(1988~1990)’은 이러한 변화의 출발이었다.


오늘날 북에서는 과학기술 우대정책을 사상의 반열에 올려 2000년부터 과학기술 중시사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행히 과학기술 정책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김정일의 판단은 2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바뀌지 않은 듯하다. 그 결과가 최근 첨단을 돌파하였다고 선전하는 ‘CNC 기술의 개발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