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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로 북한의 오늘과 내일 읽기

4. 전쟁의 이중 용도, 과학기술의 이중 용도

전쟁의 이중 용도, 과학기술의 이중 용도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전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전쟁이 과학기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1800년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처음으로 과학기술자들이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인지되어 등용되기 시작하였고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과학기술력이 전쟁을 종결짓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는 당시에는 물론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수많은 물자들이 소비되고 사람 뿐만 아니라 가축들이 죽게 되며 각종 생산시설을 비롯한 문명의 근간이 되는 시설들이 파괴된다.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전쟁을 대비해서 비축하는 물자들은 생산에 투자되지 않고 사람들이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매몰'되어 버린다. 이렇게 보면 전쟁은 경제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공포, 혹은 전쟁에 대한 기억은 경제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시 전쟁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한 동기 부여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위정자 입장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를 활용하여 사회 구성원들을 쉽게 통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대에 와서는 간접적, 심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차원에서 전쟁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전쟁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를 많이 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마련된 새로운 기술들은 전쟁 수행 혹은 전쟁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숙성된 기술은 이후 민간 영역으로 전이(spin-off)되어 새로운 생산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전쟁은 과학기술을 매개로 하여 경제발전과 연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변화를 잘 살펴보면 너무나 많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발달된 레이더 기술을 들 수 있다. 강력한 전자기파가 물체 표면에서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성질을 이용한 레이더 기술은 전자레인지 기술로 전이되었다.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전자기파는 반사하지 않고 흡수되어 그 물체의 온도를 높여준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물 분자가 전자기파를 잘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 전자레인지의 기본구조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자레인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냉동식품의 유행과 함께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주었다. 가사노동의 해방이라고도 불린 전자레인지의 보급은 부족해진 남성 노동자의 자리를 여성 노동자들이 채우게 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핵분열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제를 발견하면서 만들게 된 핵폭탄' 제조 기술이 원자력 발전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문자 발명과 인쇄술의 발명에 버금가는 정보혁명을 가져온 인터넷의 개발도 사실은 핵전쟁 이후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찾는 과정에서 착상된 것이다. 핵전쟁 이후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될 상황을 대비하여 정보를 분산 저장하고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네트워크망을 구성하다가 인터넷 망이 개발된 것이다. 또한 인터넷에서 전달되는 신호체계는 핵 관련 연구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을 찾다가 마련된 것이다.



북한 경제에 미친 전쟁의 부정적 영향


전쟁 수행이나 전쟁 준비 과정은 북한 경제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영향이 일차적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남북은 독자적으로 경제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북한은 1950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쟁 직전 상태의 경제수준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4년 북한 지역의 공업 총생산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46년에 26%까지 떨어졌다가 1949년에 95.5%까지 올라갔다. 처음으로 장기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2개년 계획(1949~1950)을 수행한 첫 해에 달성한 결과인데 다음 해인 1950년에는 133.2%로 올릴 예정이었는데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는 무산되었다.

전쟁의 피해는 참혹했다. 휴전 직후 평양 시내에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단 2채 뿐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1951년 국영 및 협동단쳬 공업 총산생액은 전쟁 전 수준의 반도 안 되었다고 한다. 특히 중공업 분야의 피해가 컸는데 연료공업은 8.7%, 야금공업은 8.4%, 화학공업은 7.7%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중공업 부문은 거의 정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채결되면서 본격적인 전후복구사업(3개년 계획(1954~1956))을 시행한 북한 경제는 1956년에 대략 전쟁 직전 상태를 벗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가 집중되었고 막중했던 중공업 분야는 해방 직전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발전공업은 1944년에 비해 86%, 연료공업은 80%, 화학공업은 93% 수준에 머물렀다고 한다. 결국 북한은 1944년 수준을 회복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렸다는 뜻이다. 한 순간의 전쟁이 짧게는 5, 길게는 10년 가량의 시간을 날려버린 것이다.


전후복구 사업 직후 수행된 15개년계획(1957~1960)이 예상보다 높은 성과를 거두면서 추진되었고 그 결과 원래 계획이 대폭 수정되었으며 계획 기간도 1년 단축되었다. 북한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공업 생산액 성장률은 195842%, 195953%까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도 성장 추세가 꺾인 것도 전쟁때문이다. 1962년부터 채택된 국방-경제 병진 노선으로 인해 전쟁 대비에 역량을 투입하는 바람에 경제 성장을 위한 여력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1961~1965년까지 성장률은 최고 20%였지만 대략 12%로 줄었다. 심지어 1965년 이후로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쿠바 사태로 촉발된 국방-경제 노선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대폭 국방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북한은 군수 경제와 민수 경제를 완전히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2경제라는 이름으로 군수 관련 경제를 민수 경제와 분리하여 집중 육성하였던 것이다. 전쟁 수행이 아니라 준비 과정에서 경제발전이 지장받은 것이다.



북한 경제에 미친 전쟁의 긍정적 영향


한국전쟁은 북한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경험이 북한 경제가 고도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7년부터 시작된 15개년 계획은 사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계획이었다. 계획 수행에 필수적인 지원이라 할 수 있었던 소련의 원조가 계획 수행 직전에 철회되었던 것이다. 단순한 물자 지원이 끊긴 것이 아니라 기술지원까지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계획 수행 첫해부터 예상치 못한 흐름이 생겼다. 일반 대중, 즉 기층의 노동자와 농민들의 참여를 적극 추동하자는 북한 지도부의 전략이 들어맞아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던 각종 예비들이 찾아졌고 새로운 혁신들이 각 처에서 수행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58년에는 기존 계획을 완전히 뜯어 고친 새로운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사회적 소유 관계를 바꾼 국영, 협동농장화 작업이 자리잡고 있었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의 경험때문에 적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는데 이를 계획수행을 위한 원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즉 이제 땅이나 공장 등이 우리 모두의 소유로 바뀌었으니 열심히 일해도 빼앗기지 않고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는 설득 논리가 마련된 것이다. 자신이 만든 결과를 부당하게 빼앗기고 차별받았던 식민지 지배 경험과 우리의 목숨과 재산을 노리는 적들의 침략을 겪었던 북한 주민들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를 지키자는 설득과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우리 것이 커진다는 논리에 힘을 받았다. 즉 전쟁의 경험이 결집력을 높여주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 이후 국방, 군수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1990년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 기강이 흐트러졌을 때에도 군대와 군수 부문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군대는 여전히 북한 지도부의 기대를 지키고 규율, 원칙을 지키는 모범이 되었다. 또한 민간 경제 가동율인 30% 밑으로 떨어졌을 때에도 군수 경제는 70% 이상을 유지했다고 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국방 부문에서 개발, 발전시켰던 첨단 과학기술이 2000년대 이후 북한 경제발전의 원동력, 밑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무슨 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이제는 인공위성 발사체 제작 기술과 핵무기 제작 기술, 그리고 각종 소프트웨어 제작 기술은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기계 장치 중에서 가장 만들기 어려운 기계장치라 할 수 있는 인공위성 발사체를 자체적으로 제작한 실력은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각종 기계 제품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수준이다. 또한 낙후한 민간 부문의 생산 시설을 일거에 생산성이 높은 기계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국방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만 있으면 국방 과학기술을 민간으로 이전하여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기로에 선 북한의 미래


군수 경제가 민수 경제로 이전(spin-off)되기 위해서는 국방에 넣은 힘을 빼야 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이 미국과 핵문제로 충돌하면서 끊임없이 요구한 것이 바로 북미 관계 정상화이다.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국방에 대한 부담이 줄어 국방에 투입된 인력, 자금, 자원 등을 민수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서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북한은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제조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켜 공개했다. 20062009년 두 차례의 핵시험과 미사일/인공위성 발사시험을 거치면서 일정한 방위전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한 북한은 CNC를 앞세워 국방 과학기술을 활용한 경제발전 전략을 본격화시키려 했다. 인공위성/미사일 제조에 필수적인 CNC기술을 민간 제조기술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들이 급격하게 추진되었던 것이다. 군보다는 민에 힘을 실어주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하지만 20133월 이러한 변화 조짐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군이 더욱 강조되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정전협정 무용화 선언, 남북 불가침 조약 폐기, 전쟁 상태 선언 등이 이어지면서 북한 사회는 다시 전시 동원체제로 돌아서든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쟁 위협 속에서는 북한의 변화 여지는 적을 수밖에 없다. 북한의 변화를 위한 전제 조건은 전쟁의 위협이 감소되고 평화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전쟁에 준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데 북한이 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듯하던 북미 사이의 대립 양상이 최근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북미, 남북 관계가 지속 가능한 평화상태로 바뀌어 북한 사회가 근본부터 바뀔 수 있기를 기원한다. 전쟁의 가능성조차 없는 사회가 되어야만 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