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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자 인물열전

8. 박성욱-새로운 과학기술자들의 대표, 1:20만 지질도 작성사업

박성욱-새로운 과학기술자들의 대표, 1:20만 지질도 작성사업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46국립 서울대학교안을 둘러싼 파동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월북할 때, 경성대학 광산야금학과를 졸업한 박성욱도 월북행을 선택하였다. 당시 최고 학부라고 할 수 있는 경성대학을 졸업한 인재였으므로 북 지도부는 그를 중히 여겼고 그의 재능을 최대한 꽃피울 수 있게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박성욱 동무, 작년부터 소련은 우리를 도와 젊고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최대 300명 규모의 유학생을 받아 고등교육을 시켜주기로 하였습니다. 동무도 이번에 출발하는 2회 유학생 파견단에 소속되어 공부를 더 하고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 소련으로 유학을 가라구요? 지금 국내에는 산업현장을 정상화시키는 데 일손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저는 제 전공을 살려 채굴산업을 정상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국내 산업을 정상화시키려면 동무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라 전체를 생각하면 당장 코앞의 일뿐만 아니라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짜야 합니다. 우리 북측 지역에는 지하자원이 아주 많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어떤 광물이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부분적으로 조사한 적은 있지만 제한된 영역에만 국한되어 부족하지요.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하자원 개발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지질조사사업을 선행시켜야 하지요.”


, 역시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짜고 있었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저는 소련에 가서 지질조사학을 공부하고 와야겠군요.”


맞습니다. 동무의 전공을 살려 모스크바 대학 공학부에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오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전공도 살리고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 정말 각오가 새로워지네요.”


 

이때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던 박성욱은 1952~53,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귀국하여 과학원 공학연구소 지질연구실과 김책공업대학에 소속되어 연구사업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준비되기 시작한 지질조사 사업은 19549‘1:20만 국가지질도 작성에 대한 방침이 수립되었고 19551월 사업계획서가 승인되어 그 해 12월 내각에서 비준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지질도 작성사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승용차, 버스, 화물자동차, 비행기, 배 등을 배속시켜주었다.


1955년 사업계획서가 승인됨에 따라 8지질조사단이라는 지질조사 사업을 전담하는 조직이 새로 꾸려졌다. 이곳에는 박성욱이 가르쳤던 김책공업대학 지질학과 1955년 졸업생 전원이 배속되었고 김일성종합대학 지질학부 교직원 및 학생들도 동원되었다. 4년을 목표로 추진된 지질도 작성사업은 1959년 말에 일부 지역과 섬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에 대한 지질조사를 완료하였고 1961년 말까지 1:20만 지질도를 완성한 후 일부 지역에 대해 1:5만 지질도를 보충하여 1962년에 최종 완성하였다.


당시 완성한 지질도는 전국을 35개 도폭으로 나누고 각 도폭조사는 2km간격으로 40개의 노선행로 조사선을 지정하여 진행하였다. 전체 지질도를 완성하기 위한 총 노선은 289142km에 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1:20만 지질도를 완성한 것은 1950년대 아시아에서 북이 처음이었다. 남한은 1970년대에 가서야 이와 같은 지질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지질조사사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진행한 박성욱은 과학원 행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911월 새로운 신진세력으로 과학원 지도부를 교체할 때 박성욱은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리승기가 담당했던 자연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여 새로운 젊은 과학기술자들 중에서 최고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그는 19579소련과 북 사이의 과학원 협정을 체결할 때 자연과학부문 대표로 협정 검토작업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련 유학생 출신 과학기술자 중에서 가장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1959927일에서 29일까지 열린 세계과학자연맹 제6차 총회에 북은 자신들의 독특한 경험을 다른 나라 과학기술자들에게 알리는 과학과 생산과의 련계 강화에서 얻은 경험’, ‘과학간부 양성에서 얻은 경험’, ‘우리나라에서의 농업에 대한 공업의 방조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고 이 발표 파견단 단장을 박성욱이 맡았다. 당시 현장중심의 과학기술연구사업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당시 북 과학기술계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던 과학자 중에서 월북한 사람이 많긴 했지만 북 사회 전반에서 남쪽 출신은 불신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소련 유학생들은 소련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중책을 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박성욱에게 이런 출신 배경은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해방이후 직접 길러낸 '새로운 인테리'(일제 시기에 교육받은 '오랜 인테리'와 대비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다. 그는 학문성뿐만 아니라 사상성까지 겸비한 새 세대 과학기술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