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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9. 천리마작업반 운동 :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천리마운동' 하면 대부분 낡은, 무식한, 노력동원 운동으로만 기억한다. 어릴 때 배운 윤리교과서 내용에 따라. 

하지만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1957년 우발적/산발전 천리마운동은 혁신운동

1958년 조직적 천리마운동은 기술혁신운동으로 바뀌는 과정

1959년 천리마작업반운동은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1958년 과학기술자들의 현장진출이 핵심 역할을 했지


따라서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기술혁신'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 

2009년 김정일 위원장이 '제2 천리마운동'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잘 보면 '기술혁신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즘 이야기하는 '정면돌파전'도 무식한, 철지난 사상동원운동이 아니라 

예비, 절약, 혁신

을 기본으로 하는 '기술혁신운동'이라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박사 학위 전체의 핵심 주장이니 자세한 것은 '북한과학기술혁성사 1'(2007, 선인)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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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작업반 운동 :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5개년 계획시작을 앞둔 195612, 북 지도부가 강선제강소 등을 찾아 대중들에게 적극적인 동참을 직접 호소하면서 북 대중운동의 대명사 천리마운동은 시작되었다. 상층의 조직적인 지도와 구체적인 계획에 입각하지 않고 거의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추진된 천리마운동195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대중운동에서 기술혁신운동으로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개별적 차원의 운동보다 집단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반적인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하나로 물리다가 천리마운동이라는 고유한 이름까지 만들어졌다.


1959년 초, 이러한 흐름에서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을 작업반을 기본단위로 하는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결심하고 다시 강선제강소를 찾았다. 당시 강선제강소에서는 사상 문제로 인한 갈등이 깊어가고 있었고 이로 인해 19591월 계획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등 위기 상황이었다.


 

동무들,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과거의 문제나 출신의 문제 등으로 사람들을 제끼기 시작하면 과연 얼마나 남겠습니까?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배제하는 그런 혁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한두리에 묶어 세우는 혁명을 해야 합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새로운 혁신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대중운동이 아니라 기술혁신운동, 그것도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리마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러자면 내용이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기술혁신운동은 단순한 생산 활동의 혁신 뿐만 아니라 인간 개조운동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사상을 개조하여 생산에서 집단적 혁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산의 주인이기 때문에 인간 개조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혁신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활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집단의 단위가 작업반으로 되고 있습니다. 집단적 혁신운동도 작업반을 기본 단위로 하고 있고 인간개조도 작업반원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과정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작업반을 단위로 하는 발전된 형태의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에서는 작업반 전체가 서로 돕고 이끌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살며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전개하면 천리마운동이 더욱 심화되어 인간의 의식개조와 경제건설 양쪽 모두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날 것입니다.


천리마운동이 강선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의 심화, 발전된 천리마작업반 운동도 강선에서 첫 봉화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사소한 생각의 차이는 접어두고 더욱 거대한 혁신을 안아오기 위해 함께 합시다. 새 조국 건설에 동참할 의사만 있다면 과거를 묻지 말고 모두 보듬어 줍시다.”


 

혁신운동의 새로운 전개 방향에 대하여 1958년 한 해 동안 진행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김일성은 작업반을 기본 단위로 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이름을 천리마작업반 운동으로 정하고 그 첫 출발을 강선제강소에서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준비 없이 전개된 천리마운동과 사후에 정비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북의 정책 수립 과정 및 그 특징을 명확히 보여준다. 지도부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주민에게 내려 먹히는 하향성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는 상향성이 나름대로 균형을 맞추면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김일성의 대중노선과 모택동의 그것이 비슷하다고 하여 김일성이 모택동을 모방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두 이론은 세부적인 것에서 차이난다. 모택동이 정책의 출발을 철저히 대중 속에서 근거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대중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흐름(from the masses, to the masses)을 자신의 대중노선이론을 통해 구체화한 반면, 김일성은 이런 모택동의 흐름 앞에 한 가지 더 추가하였다. 대중 속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도부가 방향성을 가지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대중 속에서 지도부로 나왔다가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흐름의 전 단계에서 지도부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to the masses, from the masses, to the masses) 따라서 김일성은 무작정 대중의 요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지도하여 그들의 요구를 모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한 후 그 결과를 대중 속에서 거둔다는 새로운 방식의 대중노선 이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당적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지도와 결합된 대중운동이었기 때문에 첫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발기인은 모범이 될 수 있는 단위로 준비되었다. 당시 강선제강소에서 생산 실적이 가장 좋은 작업반 중에서 3개의 작업반이 최종 후보로 추천되었다. 일부에서는 강선 토박이이면서 핵심당원인 차인걸이 전형적인 노동계급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추천하였지만 북 최고 지도부에서는 기술혁신을 많이 하여 생산실적이 가장 좋은 진응원을 선택하였다. 게다가 그는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되돌아온 귀환병이어서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자주 받아왔기 때문에 그를 모범으로 내세워 폭넓은 포용정책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이렇듯 철저한 기획을 바탕으로 추진된 천리마작업반 운동이었으므로 195938일에 처음으로 발기한 진응원작업반은 그로부터 불과 9일 뒤인 317일에 첫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첫 ‘2중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인간개조를 강조하고 공산주의 교양을 강조하였다고 하여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기술혁신운동이 아니라 사상개조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깔대기 이론이다. 북의 모든 흐름을 정치, 사상과 결부시키는 것으로 이것과 다른 흐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이 큰 이론이다. 첫 천리마작업반 운동 발기인이면서 첫 천리마작업반 칭호 수여 작업반인 진응원작업반의 결의문을 보면 사상이나 문화적 측면보다 기술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하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로동생산능률을 계통적으로 높이여 생산 계획을 일별, 월별, 분기별로 어김없이 초과완수하고 제품의 질을 결정적으로 높일 것.

창의 고안 및 합리화와 선진작업방법을 대담하게 도입하며 대중적인 절약투쟁을 강화하고 원가를 백방으로 저하시킬 것.

작업반의 전체 생산공정에 정통하고 모두가 다기능을 소유하며 4~5년 내에 기사, 기수로 될 것.

보통 지식 수준을 초, 고중 졸업 정도 이상으로 높일 것.

작업반 내의 제도와 질서를 확립하며 로동 보호 안전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며 사고를 근절할 것.

우리 당의 정책과 빛나는 혁명전통을 깊이 연구 습득하고 집단과 동지를 사랑하며 로동과 사회적 소유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로 무장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

생활을 문화 위생적으로 꾸리며 사회질서를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각종 문화 휴식과 체육 스포츠 사업에 적극 참가할 것.


 

결의문의 7가지 항목 중에서 , , , 번의 내용이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된 것이고 사상적 측면과 관련된 것은 번 항목이 유일하였다. 오히려 문화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 번과 번에 두 항목이나 들어 있었다.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사상적 측면보다 기술적 측면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면서 시작된 대중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응원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명백히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응원이 초기에 제일 신경 썼던 부분은 작업반원들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일이었다. 11명의 작업반원 중에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막 배치받은 제대군인이었기 때문에 평균 기능 급수가 다른 작업반에 비해 2급수 가량 낮았다. 진응원과 고참 작업반원은 틈날 때마다 기본 조작법을 가르쳤고 안정규정을 익히도록 도와주었다. 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신입 기능공들을 작업과정에서나 작업장 밖에서도 개별적으로 기술을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쉬는 시간 틈틈이 작업 동작을 연습하게 하여 전기로 안에서 실제 작업할 때 안전하고 빠르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응원은 전기로를 보수 정비할 때 천개를 조립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이를 줄이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는 천개랭각 링그’, 그리고 안전 발판을 제각각 들어 올려 조립하는 방법을 바꿔, 바닥에서 이들을 모두 조립한 다음 한꺼번에 들어 올려 맞추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를 통해 한 달에 4~5회씩 하던 보수작업에서 3시간가량 걸리던 천개 조립작업은 1시간 이내로 끝날 수 있게 되어, 한 번에 2시간 이상, 한 달에서 8~10시간 이상을 줄일 수 있었다. 그만큼 전기로 가동시간이 길어졌고 같은 전기로를 가지고 더 많은 강재를 생산할 수 있었다.


진응원 작업반에 배속된 기술자 출신 허인환은 전기로 설계를 변경하여 전극 아크 반사로 인해 천개가 녹아내리는 현상을 방지하여 생산량을 늘렸다. 전극의 위치와 냉각 아치의 위치를 변경하는 방법을 통해 천개의 수명을 늘렸던 것이다. 한 번에 15번의 방전밖에 못 견디던 것을 20번 이상의 방전을 견딜 수 있게 하여 보수작업 횟수를 줄였고 그만큼 전기로 가동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신입 작업반원 중 한사람인 유재일은 원료 장입 때마다 출강구로 1~2톤의 쇳물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판 등을 가지고 출강구를 막는 방법을 고안하여 손실되던 쇳물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기술혁신들을 도입하여 전기로 설비와 작업방법을 개선한 결과, 진응원작업반은 용해시간을 6시간 15분으로 2시간가량 앞당겼고 한 번에 용해시키는 쇳물의 양도 30톤에서 42톤으로 늘릴 수 있었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반대한다는 의미인데 진응원작업반처럼 하나의 거대한 전기로를 여러 작업반이 교대로 담당하는 일의 경우 자기 교대 이익만 주장하는 것도 집단주의에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자기 교대의 생산량이나 작업 실적만 신경 쓰면서 전기로의 보수나 원료 투입, 부재 투입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다른 교대들의 생산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전기로 전체의 생산량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를 북에서는 교대 본위주의라고 말하면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진응원작업반은 교대 본위주의를 반대하면서 자기 교대 실적보다 전기로 전체의 실적을 올리는 일들에 앞장섰다.


진응원작업반은 자기들 교대 시간에 남들보다 일을 더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기로의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다음 교대에게 작업을 넘기려고 노력하였다. 교대 시간을 넘기더라도 제때에 원료와 부재를 투입하고 전기로 수리를 완성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로 인해 자신들은 일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생산량은 오히려 다른 작업반들보다 낮아졌지만 전기로 전체의 생산량이 올라가는 것을 기준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작업반원들은 자기 교대의 이익보다 전기로 전체의 생산량을 우선시 하는 것이 진정한 집단주의 정신이라고 교육받았다. 교대 본위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을 공산주의 교양의 한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다른 교대들도 진응원작업반에게 영향을 받아 자기 교대만 위하려고 하지 않고 전기로 전체의 생산량 증대를 위해 전기로의 보수, 정상 유지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기로 전체의 생산량을 기준을 했을 때 그전보다 생산량이 훨씬 더 늘어났다.


이처럼 천리마운동이 구체적인 계획 없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추진된 대중운동이었다면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대중과 당적 지도의 결합에 의한 결과였다. 그리고 단순한 대중운동이 아니라 기술혁신운동이었고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를 지향 이데올로기로 설정한 운동이었다. 천리마작업반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면서 공산주의 교양도 함께 전개하였다. 여기서 공산주의 교양이란 마르크스-레닌 이론이 아니라 집단주의와 노동당의 정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