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과학자 인물열전 썸네일형 리스트형 3.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강호제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1946년 여름, 김일성은 남에서 어렵게 모셔온 과학자들을 만났다. “다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의 경제가 빨리 클 수 있으려면 과학기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열심히 해봅시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저희 같은 과학자들을 배척하고 있는데 북에서는 저희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해서 많은 고민 끝에 올라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현재 북에는 일제 시기 건설된 각종 공장과 생산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작동을 못 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일제가 도망가면서 고장낸 것을 고치지 못한 것도 많고 기술자가 부족하여 어떻게 작동시켜야 할지 몰라서 운영을 못하고 있는 것도 많지요... 더보기 8. 박성욱-새로운 과학기술자들의 대표, 1:20만 지질도 작성사업 박성욱-새로운 과학기술자들의 대표, 1:20만 지질도 작성사업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안’을 둘러싼 파동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월북할 때, 경성대학 광산야금학과를 졸업한 박성욱도 월북행을 선택하였다. 당시 최고 학부라고 할 수 있는 경성대학을 졸업한 인재였으므로 북 지도부는 그를 중히 여겼고 그의 재능을 최대한 꽃피울 수 있게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박성욱 동무, 작년부터 소련은 우리를 도와 젊고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최대 300명 규모의 유학생을 받아 고등교육을 시켜주기로 하였습니다. 동무도 이번에 출발하는 2회 유학생 파견단에 소속되어 공부를 더 하고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 더보기 7. 주종명-“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하자.” 주종명-“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하자.”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55년 어느 날, 김책제철소에 설치된 과학원의 임시사무실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연구사 동무, 용광로가 이상합니다. 온도가 내려가고 있어요.” “네? 그럴리가요. 같이 가 봅시다.” 당시 김책제철소에는 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파견한 과학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새로운 제철공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철콕스 연구’팀을 꾸리고 코크스를 적게 쓰는 방법, 즉 100% 수입에 의존하는 코크스탄 대신 북한에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을 이용해서 강재를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강재 생산의 자립화를 위한 연구였다. 당시 연구팀 책임자는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1952년부.. 더보기 6. 김봉한-경락의 대발견 김봉한-경락의 대발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61년 8월 평양의과대학 교수 김봉한은 “경락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강조되던 동의학(한의학)의 과학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경락(經絡)과 경혈(經穴)은 인체에서 기(氣)가 흘러다니는 길과 중요한 자극지점과 같은 것인데 한의학, 특히 침구학의 치료법은 모두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인체의 표피에 분포되어 있는 경혈을 찾아 적당한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그 경혈이 연결되어 있는 경락을 타고 몸속 장부에 전달되어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인 기는 물론, 경혈, 경락 등이 현대과학적.. 더보기 5.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전후복구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54년 7월 중순, 김일성이 길주에 있는 펄프공장을 현지지도차 방문하였다. 당시 길주펄프공장에는 전쟁 시기 월북한 화학공학자 마형옥이 기술지원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형옥 선생,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수상 동지. 이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펄프공장을 정상화시키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나라를 빠른 시일 내에 강력한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일으켜 세우는 데 선생과 같은 과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 시기 북으로 올라오는 동안에는 지.. 더보기 4. 계응상-1호 박사 계응상-1호 박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49년 초가을, 중앙잠업시험장으로 김일성이 급히 찾아왔다. 당시 중앙잠업시험장과 원산농업대학에서는 교육성 부상, 농업성 잠사국 국장 등으로 구성된 검열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검열단이 1주일 동안 ‘료해사업’을 진행한 끝에 중앙잠업시험장 장장(場長)이면서 원산농업대학 잠학부 부장인 계응상을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일성이 급히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래, 계응상 동무를 철직시킨 이유가 뭡니까?” “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번에 잠업시험장에서 개발하여 보급한 ‘국잠43’, ‘국잠47’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 누에는 생활력이 약해서 병이 돌아 수확을 하지 못한 농가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습니.. 더보기 2.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승기’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엄친아의 대명사, 가수, 허당’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북에서 ‘리승기’라고 하면 ‘과학자의 대명사’이자 가장 유명한 과학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합성섬유 ‘나일론’에 버금가는 ‘비날론’을 발명한 사람이다. 비날론의 발명과 이를 공업화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그는 1959년 처음 제정된 ‘인민상’의 과학자 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로력영웅’ 칭호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상과 김일성훈장까지 받았다.(제1회 인민상을 리승기와 함께 받은 기술부문 수상자는 주종명이다) 석유를 주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 더보기 1.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