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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3.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4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이번 대회기간 동안 토론을 활발하게 진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깊이 토론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흩어져있는 과학기술자들이 한 데 모여 집체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과학원을 설립할 방안을 더욱 구체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국가계획위원회의 과학연구국이 과학기술 정책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기술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되고 다른 기관들과 협력해서 일하기에도 부적절한 상태입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과학기술자들을 한 데 모여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인 과학원을 별도로 세워야겠습니다.”

 

실 과학원과 같은 중앙집권화된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세우자는 김일성의 제안은 처음이 아니었다. 19472월에 설립된 북조선 중앙연구소가 첫 시도였는데 실제 연구를 담당할 과학기술자가 부족하여 6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5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과학기술자를 확보하여 당시 구상을 실현할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판단이 섰기에 김일성이 다시 한 번 과학원 설립을 제안했다.


이번 제안에서 김일성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소련 과학원이었다. 195257일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할 때까지 과학원의 이름은 소련 과학원의 이름을 그대로 베낀 조선과학아카데미였는데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개원할 때 비로소 과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조선 중앙연구소는 일제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꾸려졌던 반면, 새로 설립되는 과학원은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소련식 과학연구기관으로 만들어졌던 셈이다. 소련의 과학기술 체계는 교육기관부터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합대학과 분과별 대학이 분리된 것처럼 과학원은 전문연구활동을 담당하고 분야별 기술지원활동은 각 생산성에 설치된 연구소들이 담당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설립 초기 과학원은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활동은 염두에 두지 않고 국가적 단위의 연구활동에만 매진하는 형태로 계획되었다.


과학원은 과학기술 관련 모든 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우리로 치면 행정기관인 과학기술부, 연구기관인 정부출연연구소, 교육기관인 KAIST, 원로 과학기술자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을 통합시킨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과학원 창립 당시 분야별 중심 과학기술자들에게 원사, 후보원사의 칭호를 부여했고 3개의 부문별 위원회(자연 및 기술과학/의학 및 농학/사회과학)을 꾸렸으며 모두 8개의 연구소(물리수학/화학/의학/농학/역사/물질문화사/경제법학/조선어·조선문학)를 설치했다. 원사의 80% (8/10), 후보원사의 60% (9/15)가 월북한 사람들이었을 정도로 지난 시기 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했던 다양한 노력 중에서 월북유도사업은 가장 효과적이었다.


북은 소련의 과학원을 그대로 베끼고 따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과학원의 경우 설립 초기부터 북의 스타일대로 변형되었다. 우선 기술지원활동을 생산성 산하 연구소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과학원이 직접 생산현장에 뛰어들어 현장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 집행해나갔다. 이는 이후 현지연구사업이라는 독특한 북의 과학기술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소련 과학원에 없는 공학연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는데 이는 학술적이고 원론적인 연구에만 치중하지 않고 현장 중심의 실용적인 연구에도 집중하려던 의도였다. 기초과학을 강조하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응용과학을 강조하는 북 스타일이 생겨난 흐름이었다. 특히 북 방식의 변용인 공학연구소1950년대 말 15개년계획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성과(비날론, 염화비닐, 합성고무, 코크스 없는 제철법 등)를 내면서 북 지도부가 독자노선, 자립경제노선을 추구하는 데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에 설립된 과학원은 이후 3년 동안 내실을 다져 본격적인 경제발전 계획이 추진된 1957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북 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과학기술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리마운동이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단순한(혹은 무식한?) 노력동원식 대중운동이었다는 평가는 이러한 과학기술계의 움직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원은 196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과학원은 과학기술계만으로 재조직되었고 의학, 농학, 사회과학 등 다른 분과들은 독립하여 별도의 과학원 체계를 구성하였다. 오늘날 과학원은 예산편성권까지 확보하여 과학기술 활동과 관련한 모든 권한을 갖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과학기술, 특히 국방과학기술을 앞세운 경제발전전략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가과학원과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기술 담당)의 활동은 북 경제활동의 최중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