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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22. 1972년 청와대를 충격에 빠뜨린 기록영화 22. 1972년 청와대를 충격에 빠뜨린 기록영화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72년 초, 청와대에서 비밀스러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북이 자신들의 산업발전을 기록한 영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전 국무위원, 정계 중진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영화를 보는 동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장내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을 기획하고 있던 정부 인사들은 영화 속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임자, 저걸 본 소감이 어떤가?" (박정희) "대…, 대단합니다." (최형섭 당시 과기처 장관) "...,.. 더보기
23.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학자들이 당정책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의도를 똑똑히 모르고 있으며 그들 속에서 우리 당의 사상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좋지 못한 현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인테리들 가운데는 《항일빨지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소설 보듯 한번 훑어 읽으면 다 알 수 있는데 무엇을 자꾸 연구하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상기를 학습하라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 혁명가들의 풍모, 그들의 사업방법과 사업작풍, 혁명가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배워.. 더보기
4.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12월 29일,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 더보기
3.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4월 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 더보기
2.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더보기
1.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라.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라. 강호제 (겨레나하 평화연구센터 소장)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2012~3년에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가 대폭 개정되었다. 그 결과 대학과정에서'만' 배우던, 강체/유체, 상대론 등이 고등학교 물리2에 포함되었다. 문과/이과 구분을 없애자는 논의가 진행되다가, 서로 자신들의 과목이 더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하다가, 엉망이 된 듯한데, 여튼, 물리 교과서 내용이 너무 어려워진 결과가 나았다. 그 결과? 물리를 선택하는 학생이 대폭, 폭삭 줄었다. 고등학생들이 선택하는 과학 과목은 1, 2위가 생물/화학이었고 물리와 지구과학이 넘버 쓰리 경쟁을 했는데 위와 같이 교과서가 바뀐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 이제 확고부동 물리가 4위로 내려앉았다. 오히려 지구과학은.. 더보기
24.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강호제 (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4년 어느 날, 전쟁 시기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갔던 리종만이 귀국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리종만은 전국 각지에 10여 개의 큰 광산과 수백 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과 수백 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3:7 소작제를 시행한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을 지낸 일제 시기 대표적인 사업가 중 한 사람이다.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월북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그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