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09년 3월호)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민족21 2009년 3월호)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강호제 



“과학기술자들은 현지에 나가서 연구하라.”

: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오늘날 북에서 과학기술 관련 연구, 정책 등을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기관은 ‘과학원(현 국가과학원)’이다. 과학원은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다. 1958년 1월 3일 밤, 중앙역사박물관에 마련된 과학원 임시 청사의 원장실로 김일성이 불쑥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던 백남운 과학원 원장은 깜짝 놀라면서 그를 맞이하였다. 

“아니, 수상님께서 이 늦은 밤에...”

“이 옆을 지나다가 원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잠시 들렀습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작년에 우리 인민들이 거둔 놀라운 성과들을 다시 보고 있었습니다. 해외 원조도 갑자기 끊어진 상태에서 목표치의 두 배인 44%를 달성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기적!”

1956년 12월 27일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1차 5개년계획 첫 해인 1957년 생산 실적은 원래 계획을 두 배나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5개년계획 목표는 2년 반 만에 조기달성될 수 있었다. 북 역사상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렇지요. 어렵지만 혁명을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거둔 성과입니다.”

“예... 이런 수치들을 보면서 우리 과학원이 좀 더 열심히 일하면 성장률이 더욱 더 높아질 텐데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 과학원에서는 무엇을 했던가 반성이 많이 들었습니다. 수상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과학원 사람들은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비날론 연구도 잘 진척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당시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적 성과는 ‘비날론 공업화’를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 시기 리승기 박사가 발명한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생산하는 세계 최고 규모의 공장을 완공한 것이다. 

“예. 그렇지만 생산 현장에서 기술지원에 대한 요구가 높은데 그 요구에 충분히 호응하고 있지 못해서... 생산현장에서는 한 명의 과학기술자가 절실한데 우리 과학원 성원들이 이런 실정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지 못하는 듯합니다.”

사실 당시 북은 소련에서 생산현장에 파견해 주었던 과학기술자들이 1957년 12월 대거 본국으로 소환되어 기술지원활동에 큰 지장이 초래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원 구성원들을 활용할 방안을 여러 모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공학연구소에서 현장에 기술지원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부 과학기술자들은 현장에 대한 기술지원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기술지원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많습니다. 현장에 가서 기술지원활동을 하다보면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현장 활동이 연구 활동에 지장을 준다는 거지요.”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과학원에서 원천기술을 개발해야 나라 전체의 과학기술 수준이 올라가는 거니까요. 과학기술자들은 기본적으로 연구 활동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현장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상적인 문제도 있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신비성만을 부르짖으며 이른바 상아탑 속에 틀어 박혀 순수이론만을 추구하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현실에 귀 기울이고 생활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과학자의 위신이 훼손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신성한 노동을 천하게 여긴다고도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이 문제에 대해 토론과 교양을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여전히 안 바뀌는 부분이 있는가보군요.”

“처음에는 별로 반응 없다가 작년부터 혁명적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에 영향을 받아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

“스스로 현실 문제로 눈을 돌리고 현장으로 달려 나간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시킬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래, 과학원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데 뭐가 가장 부족한가요? 연구소에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받고 있지는 못하지요?”

“국가적으로 연구에 필요한 물자를 우선적으로 공급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연료, 원료, 실험설비 등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수입해야 하는 물자들도 많은데 아직 원하는 만큼 수입해서 공급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 전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정도면 충분히 참고 견딜만 합니다.”

“그래요? 꼭 필요하면 수입해서라도 연구를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료나 연료 등을 활용해서 연구하면 그 결과를 현장에 적용하기 쉬울 텐데...”

“그래서 연구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생산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물자들을 채취하여 성분분석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료를 현장에서 연구소로 옮겨오는 것도 좋지만 연구소를 아예 현장으로 옮기는 것은 어떨까요? 생산 현장에 연구소를 마련해 두고 현장에 풍부한 물자들을 연구에 활용해도 좋을 듯 합니다만... 중요 생산현장에는 원조 받은 최신 설비들이 가동 중에 있으니 짬이 날 때 이들을 연구에 활용하는 방법도 있겠군요.”

“수상님! 그런 방법도 있군요. 연구소를 생산현장 바로 옆에 마련하면 기술지원 활동도 제때 이루어질 수 있겠네요.”

“그냥 현장에 대한 기술지원활동을 하라고 하면 연구에 지장 받을까봐 꺼려할 과학기술자들도 현장에서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틈나는 대로 기술지원활동을 하라고 하면 반발심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과학원 성원들에게 이러한 수상님의 생각을 전하고 곧바로 실천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과학원은 ‘현지연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자들을 생산 현장으로 대거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개별적 혁신운동 차원에 머물러 있던 천리마운동은 현장 과학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기술혁신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연료, 원료, 기술 등의 자립과 집단주의가 결합된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