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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09년 12월호)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라

(민족21 2009년 12월호)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라. 




강호제 



민족21, 2009년 12월호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라. 


1946년 여름, 김일성은 중견간부훈련소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전국에서 선발된 299명의 학생들이 외국으로 유학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생활환경이나 공부 진척 상황 등을 살펴보던 김일성은 많은 학생들이 과학기술이 아니라 사회과학 관련 학과로 진학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동무들이 수학,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치만 배우겠다고 하면서 사회과학 학과에 가겠다고 제기한다는 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우리의 힘으로 공장도 돌리고 철도도 운영하고 농업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 기술자들이 다 도망가고 우리 기술자도 없습니다. 지금 성냥 하나, 펜촉 하나 똑똑히 만들지 못합니다. 동무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큽니다. 

동무들은 과학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정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라야 정치를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술과학을 더 잘 배워가지고 와야 합니다.”

식민지 시기, 일제는 조선인으로서 고급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과학기술 지식을 조선인이 갖는 것을 최대한 막아 해방 직후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과학기술자는 남북한 통틀어 4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북에 있었던 사람은 10여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당시 북에 있던 기술자와 기능공의 수도 대략 500여 명, 3,00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것도 대다수가 중등학교 이하 출신의 하급인력이었다.

앞으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기술자 확보가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 판단한 북 지도부는 해방 직후부터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과학기술자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시기에 길러진 과학기술자은 인원도 많지 않고 사상성과 과거 행적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즉각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적극 추진되었다. 북에 거주하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우대하면서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하였고, 남에 거주하던 과학기술자들은 안면이 있는 사람을 통해 월북하도록 유도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당시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은 리승기나 강영창과 같은 고급 과학기술자가 많았는데 이후 북 과학기술계의 핵심이 되었다. 

시간이 걸리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를 확보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직접 교육시켜 길러내는 것이다. 북 지도부가 원하는 인재는 과학기술 관련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사회주의 사상까지도 겸비한 사람이었다. 즉 홍(紅)과 전(專)을 겸비한 인재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재를 자체적으로 길러내기 위해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1947년 흥남공업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교육기관을 제대로 꾸리고 운영할 여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에 유학을 보내 인재를 기르는 방법도 1946년부터 적극 시행하였다. 위의 김일성 연설을 들었던 학생들은 ‘1차 유학생’들이었다. 모두 299명이 뽑혔는데 이후 파견 학생의 규모가 약간씩 변동은 있었지만 매년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권 나라들로 유학생들이 보내졌다. 이러한 유학생 파견사업은 전쟁 중이던 1950년대 초에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유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부터였지만 본격적으로 귀국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전쟁이 끝나면서부터였다. 귀국한 유학생들은 과학원을 중심으로 중요 생산현장의 기사나 관련 행정기관에 배치되었다. 1950년대 말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한 북의 기술혁신운동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장에 자리잡기 시작한 ‘귀국 유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학생들이 과학기술보다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싶어한 이유에는 과학기술을 담당했던 중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인문학을 상대적으로 우대했던 조선시대의 영향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핵심적인 것은 식민지 시기 일제의 정책에 의한 영향이었다. 일제시기 한반도에 설치된 유일한 이공계 대학은 1941년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교 이학부였고 연희전문학교와 같은 일부 전문학교에서 겨우 과학기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조선인으로서 과학기술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유학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는데 이마저도 조선과 일본의 학제가 맞지 않아 조선인에게 불이익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공계 전공한 학생들이 전공 관련 일자리가 한반도 내에서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일자리가 학생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치는 교사 자리였다. 생산현장에서 중요한 기술은 일본인들만 담당했고 조선인에게는 기술을 전수시켜주지 않으려고 했다.

일제는 조선인이 과학기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치밀하게 차단하면서 관련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여 이를 전공하겠다는 의지마저 갖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이공계 기피현상은 과학기술자로서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이 제시되어야 함은 물론 사회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의 지위가 높아져야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위 김일성의 연설은 이런 점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국가경제발전의 핵심이 과학기술에 달려있고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과학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은 많은 인원과 자금, 그리고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라 ‘거대 과학(Big Science)’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많은 자원을 계속해서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확고한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북이 1950년대 말에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전략을 나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밑바탕에는 김일성의 확고한 ‘과학기술 중시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김정일도 과학기술 중시사상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고 하니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전략이 추진될 수 있는 기본은 갖추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