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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10년 1월호) 주체의 시작은 정치사상이 아니라 과학기술로부터


(민족21 2010년 1월호) 주체의 시작은 정치사상이 아니라 과학기술로부터


강호제 



민족21, 2010년 1월호

주체의 시작은 정치사상이 아니라 과학기술로부터


“유감이지만 우리의 선전사업은 많은 점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주체가 없는 것이 사상사업에서 가장 주요한 결함입니다. …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 주체는 무엇입니까? …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를 알아야 하며 조선의 지리를 알아야 하며 조선인민의 풍속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민을 그들의 구미에 맞도록 교양할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향토와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주체’는 북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북은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국가의 지향으로 삼고 있으며 스스로도 ‘주체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야기는 1955년에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 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의 일부이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이 ‘주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당시 주체의 의미는 1965년 이후 정식화된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군사에서 자위, 사상에서 주체’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단지 “남의 것만 좋다고 하면서 우리 자체의 것을 소홀히 하는 현상”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도였다. 

또한 이런 의미의 주체는 당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세력인 ‘소련파’를 비판, 견제하기 위한 논리로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 연설에서 김일성은 인민군휴양소에 조선의 풍광을 담은 그림보다 시베리아 초원 그림이 걸려 있고, 지방의 민주선전실에 북의 3개년계획에 대한 선전물은 없고 소련의 5개년계획에 대한 도표만 있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또한 인민학교에 걸려 있는 사진 중에 소련 사람들은 있지만 조선 사람은 없다고 비판하였다. 즉 소련으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받고 있는 시점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정치, 사상적인 부분에까지 절대화 되어가는 현상을 견제하기 위해 ‘주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연설 이후 ‘주체’라는 말은 1960년대 초중반까지 북한 사회에서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다.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 자칫하면 ‘수정주의적 편향’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은 이러한 비판을 이길 힘도 없었고 구체적 근거도 마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쓰였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주체’를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이 바로 ‘과학기술’ 분야였다. 단순히 조선의 현실만을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연료, 원료, 기술, 인력의 자립’이라는 구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의 자립’에 해당하는 ‘자립갱생’의 원칙까지 확립하였던 것이 바로 과학기술 분야였던 것이다. 

사실 북과 같은 소규모 신생 독립국가의 경우 경제적 독립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치, 사상적 독립은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김일성 세력의 최대 위기라고 하는 1956년 ‘8월종파사건’ 당시, 소련과 중국이 내정간섭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들로부터 막대한 돈과 자원,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적 조언까지 지원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에 주체를 강하게 제기하기 시작하다가 비판에 직면했던 북 지도부는 주체라는 말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였다. 대신 1957년부터 과학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주체’를 정책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소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작성한 ‘과학연구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을 전면 수정하기 시작하였고, 소련 과학기술자들의 철수에 맞서 생산현장에 과학원 소속 과학기술자들을 직접 투입하는 ‘현지연구사업’을 시행하였다.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동시에 수행하라는 현지연구사업은 다행히 긍정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일부 과학기술들은 중공업 중심 정책에 따라 대규모 공업화 단계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는데 이 또한 다행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 북 과학기술계가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리승기가 발명한 비날론의 공업화 사업이었다. 1961년 5월 1일, 세계 최대인 년산 2만 톤 규모의 비날론 공장이 준공되었는데 이를 북 지도부는 “당 과학정책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한 수령의 교시를 빛나게 실천한 산 모범”이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에서 풍부하게 구할 수 있는 원료, 연료를 사용하여[원료, 연료의 자립], 조선 사람이 직접 발명한[기술의 자립] 비날론을 조선 사람들이 직접[인력의 자립] 대규모 공업화에 성공한 것이므로 ‘주체 확립’을 구현한 가장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과학에서 주체성 있는 연구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둠에 따라, 이는 역으로 ‘주체의 과학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가장 과학적인 것에서 주체의 정당성이 밝혀졌으므로 ‘주체적인 것’이 곧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 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주체의 주장이 ‘수정주의적 편향’이라는 비판으로부터 떳떳해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즉, 비날론, 합성고무, 코크스 없는 제철법 등 연료, 원료, 인력, 기술 등의 자립을 실현시킨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가 없었다면 ‘주체’라는 추상적인 정책이 실질적인 힘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성과들이 거두어졌으므로 ‘주체’가 ‘자립경제’ 정책으로 구체화, 현실화될 수 있었고 나아가 ‘정치에서 자주, 국방에서 자위, 사상에서 주체’라는 정책으로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주체는 ‘주체사상’으로 정식화될 수 있었다. 

결국 주체의 실질적인 시작은 과학기술 분야였다.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 하는 ‘주체와 과학기술의 결합’은 주체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