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민족21 연재)

(민족21 2010년 5월호) 2·8 비날론 공장 건설


(민족21 2010년 5월호) 2·8 비날론 공장 건설


강호제 



민족21 2010-5월호 - 2·8 비날론 공장 건설


1958년 6월 어느 날, 김일성이 비날론 중간 시험공장을 만들고 공업화 단계 시험을 진행하고 있던 비날론 연구집단을 찾아왔다. 당시 비날론 공업화 연구는 일제시기 석탄과 석회석을 주원료로 합성섬유 비날론을 직접 발명한 월북 과학자 리승기가 책임자로 있었다. 

“리승기 박사, 비날론 공업화 연구는 잘 되고 있습니까?”

“네. 나라에서 연구에 필요한 기계나 설비, 원료 등을 충분하게 지원해주고 있어 실험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완성한 중간공장에서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하루 200kg 생산은 너끈히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대단합니다. 상황이 많이 어려울텐데 열심히들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인 공장 건설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되겠습니까?”

“네, 아직 걸리는 부분이 남긴 했습니다만 조만간에 해결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비날론 공장 건설사업을 시작해야겠군요. 안 그래도 요즘 우리나라 인민경제의 발전속도가 매우 빨라져 모든 부문들에서 계획을 새롭게 세우고 있습니다. 특히 중공업 부문의 실행 계획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1956년 12월 강선에서 발산되기 시작한 인민들의 혁명적 열의가 경제발전 속도를 계획보다 최소 2배 이상 높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비날론 공장 건설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어 이렇게 상의하러 온 것입니다.”

“네, 저희도 분발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천리마에 올라탄 기세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 과학자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비날론 공장을 건설하게 되면 비날론만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들이 생산되니 인민 경제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지난 번 수상님 말씀대로 비날론 공업화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당중앙에서는 최대한 비날론 공장을 빨리 짓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도 규모를 최대한 키워서 말이요. 그래야 인민경제의 발전 속도를 더욱 끌어올릴 수 있을테니까요.”


이날 리승기를 비롯한 비날론 연구집단과 김일성의 비공식 만남은 1958년 10월 9일 내각결정 122호 ‘비날론 및 염화비닐 공장 건설을 촉진시킬 데 관하여’로 이어졌다. 6천 톤 규모의 염화비닐공장과 1만 톤 규모의 비날론공장을 각각 1959년과 1960년까지 건설하겠다는 결정이었다. 1954년에 일산 20kg(년산 6톤) 규모의 중간공장 건설 이후 3년 만에 10배 규모의 중간공장 건설에 겨우 성공하였는데, 1957년부터 4년 만에 거의 150배 규모의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천리마운동 시작 이후 경제발전 속도가 자신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자신감을 가진 북한 지도부가 과감하게 목표치를 대폭 상향조정한 것이었다. 또한 과학기술자들의 현장진출을 통해 공업화 속도를 빨리 해보겠다는 과학원의 ‘현지연구사업’의 성공적 추진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또 한 번의 모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처럼 비날론공장건설 계획이 급작스럽게 추진되었기에 실제 공사가 진행된 것은 내각결정이 있은 1년 후부터였다. 비날론 공장부지는 1959년 3월 25일 김일성이 직접 흥남, 함흥 지역을 현지지도하면서 잡았고 본격적인 공장 건설사업은 1960년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면서 북한 지도부는 비날론공장을 북한경제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공장 규모를 년산 1만 톤에서 2만 톤으로 늘여 세계 최대 규모로 설계변경하였다. 또한 원래 1960년 8월 15일로 예정되었던 준공일도 5월 6일로 100일가량 앞당겨졌다. 게다가 과학기술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비날론 공장 건설인 만큼 과학기술적 뒷받침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비날론 공장이 들어서는 곳 주변에 관련 연구기관 및 교육기관을 모두 모아 ‘과학원 함흥분원’을 따로 꾸렸다. 북한 과학기술 정책의 상징인 ‘현지연구사업’의 확장판이었다. 

그 결과, 총면적 50만㎡, 건평 4만㎡ 위에 거의 만 톤에 이르는 1만 5천여 개의 기계설비와 장치를 가진 ‘2·8비날론 공장’이 들어섰다.(‘2·8’이란 청산리방법이 창안된 1960년 2월 8일을 뜻한다.) 이 공장의 배관길이는 서울-부산 거리를 넘는 500㎞가 넘었고 50만㎥의 흙을 파내였으며 8만㎥의 콩크리트를 타설하였다. 물론 갑자기 설계 변경된 추가 1만 톤 규모의 공장은 2단계 과정으로 남겨둔 채 1만 톤 규모의 설비만 완성한 상태였다. 2단계 공사는 1960년대 중반까지 완성되었고 1970년대에는 5만 톤까지 규모가 확대되었다. 오늘날 ‘2·8비날론연합기업소’는 1974년에 염화비닐공장과 비날론공장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1961년 비날론공장 건설 과정에서 북한 경제정책의 대명사로 통하는 ‘◯◯ 속도’가 만들어졌다. 비날론 공장 건설과 관련한 것이었으므로 ‘비날론 속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계획 달성을 500% 수행하면 수수하고 1000% 수행하면 괜찮다’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계획을 단순히 초과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 5배에서 10배 가량을 달성해야 한다는 엄청난 속도를 강조한 것이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비날론공장은 과도한 전력 소비와 원료 공급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정상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1990년대 북한 경제가 주저앉으면서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였다고 북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비날론 공장이 북한 경제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나 다른 경제 부문과의 연관성, 특히 이에 대한 김일성의 애착 등을 고려했을 때, 북한 지도부는 비날론 공장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살아난 비날론 공장은 이전과 달리 모든 부분이 ‘CNC화’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전부터 강조하던 ‘자동화’와 어떻게 다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전력소비 문제나 원료조달 문제 등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에 대한 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비날론 공장 재가동 소식에 대한 평가는 좀 더 기다려봐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 10만 톤 규모로 건설하기 시작하다가 5만 톤 1단계 공사만 겨우 끝낸 후 곧바로 멈춰 버린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가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봐야 북한 비날론공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