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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북한과 미국, 핵문제 (2008년 1월 시점)

북한과 미국, 핵 문제

- 북·미의 전략적·정치적 결단을 촉구하며

김정환(KBS 보도본부 남북관계 예비 전문기자)


1.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묘하다.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 북한과, 세계 최강 미국. 언뜻 두 나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핵을 매개로 놓고 벌어지는 북·미의 힘겨루기는 간단치 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핵무기를 활용해 살아남으려는 북한과, 핵의 국제적 확산 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미국. 여기서 벌어지는 고차원의 방정식은 남북 관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한반도의 정세를 비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핵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무엇보다 지지부진한 북한의 핵 신고를 놓고 북한만이 아닌 미국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혀본다. 또 한국의 이명박 새 정부의 다음 달 출범과, 올해 정권 교체기에 들어간 미국의 국내 정치가 핵 문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전망해 본다.

2. 먼저 1994년에 나온 북·미 기본 합의(Agreed Framework) 이전, 핵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움직임을 정리해본다. 필자가 접한 자료들 가운데 가장 정리가 잘 된 『두 개의 한국』(돈 오버도퍼 지음)을 중심으로, 기타 일지를 참고로 해 시간 순으로 전개한다.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막을 내리고 1957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어니스트 존(Honest John) 미사일과 280mm 장거리포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미국이 한국 땅에 처음으로 핵무기를 배치한 것이다. 1959년 9월, 북한은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맺었다. 소수지만 북한 과학자들은 모스크바 근처의 두브나(Dubna) 핵 연구센터에서 연수를 받았고, 1962년 1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IRT-2000 연구용 원자로의 착공에 들어갔다. 2년 뒤, 북한은 영변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고, 같은 해 첫 원폭 실험에 성공한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다. 북한은 이듬해 6월, IRT-2000 연구용 원자로의 가동에 들어갔다. 1970년대 초, 월남전을 겪으면서 한국의 안보 위험론이 강화되면서, 1972년 한국에는 763개의 핵탄두가 배치됐다. 1974년, 북한은 다시 한 번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다시 거부당했다. 1975년 6월, 슐레진저 미 국무장관은 한국에 미국의 핵탄두가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듬해 6월 처음 이뤄진 팀스피릿 한·미 연례 합동 군사훈련은 이후 대규모의 병력 이동과 함께 핵무기 사용 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1976년 8월,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지휘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살해하자 미국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전투기와 전함을 대거 배치했다. 이 같은 긴장은 이후 카터 행정부가 한국에 배치한 핵탄두를 250개로 감축하면서 낮아졌다. 1980년 7월, 북한은 자체 기술로 5MWe 규모의 실험용 원자로 착공에 들어가 1986년 10월 가동에 들어갔고, 1983년에는 고성능 폭발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파악했다. 1985년에는 재처리 시설 공사에 들어가 4년 뒤 완공했고, 1995년을 목표로 50MWe 원자로도 착공했다. 1989년, 북한은 다시 200MWe 원자로 공사에 나섰고, 같은 해 9월, 프랑스 상업 위성이 영변 핵 시설을 촬영해, 이후 핵 위기가 급속하게 번졌다. 한국에는 1989년 아버지 부시 미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약 100개의 핵탄두가 배치돼 있었다. 1991년 8월, 소련에서 공산주의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한 달 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에 배치한 미군의 지상과 해상 발사 전술 핵 무기를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작용과 반작용’을 논하고, 시발점을 따질 생각은 별로 없다. 한 가지, 한국전쟁 뒤, 미국이 대량의 전술 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한 것은 분명하며, 이로 인한 것이건 다른 이유에서건 북한은 체계적인 핵 개발에 나선 것 역시 명확하다. 다만 북한이 애초부터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했느냐는 다소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핵 개발의 성격이 핵무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3. 199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권이 무너졌다. 북한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자신들의 든든한 배경이 없어진 것이다. 체제의 존폐 위기 앞에 선 북한은,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에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채택한다. ‘공동 선언’에서 남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하고(1항),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하기로(3항) 합의한다. 남쪽의 뜻을 대부분 들어주면서까지 체제 붕괴를 우려한 북한의 고육지책이었다.

1993년부터 본격화된 제1차 북·미 핵 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 기본 합의로 해소된다. 이 과정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중재를 한 것과, 클린턴 미 행정부가 이른바 북폭을 하기 위한 시뮬레이션까지 한 것 등 어느 정도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미 군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첫 3개월 동안 미군 5만 2천 명, 한국군 49만 명이 죽거나 다칠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에는 북한군과 민간인 사상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또 군비는 61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글에서는 주요 일지를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1993. 2. 25, IAEA 정기 이사회, 대북한 특별시찰 수락 촉구 결의 채택
1993. 3. 12,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1993. 3. 18, IAEA 특별 이사회, 대북한 결의안 채택
1993. 4. 8, 유엔 안보리, 북한 핵문제 관련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1993. 5. 11,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안 채택.
1993. 6. 3, 박길연 주UN 북한대사, UN 제재 조치 시 '한국전쟁 재발' 발언
1993. 6. 12, 3차 북·미 고위급 회담. 북한 NPT 탈퇴 유보
1993. 6. 14, 한국 팀 스피릿 훈련 중단 발표
1993. 8. 4, IAEA 사찰단 방북. 북, 영변 핵폐기시설 사찰 거부. 제한적인 사찰
1993. 10. 1, IAEA 제37차 총회 대북 결의안 채택. 핵안전 협정의 완전한 이행 촉구
1993. 11. 11, 북한, 미국에 핵문제 일괄타결 제의
1993. 12. 29, 북·미, 뉴욕 추가 접촉서 핵사찰 수용 합의
1994. 1. 7, 북·IAEA 사찰 협상 시작
1994. 1. 25, 북한·IAEA 협상 결렬
1994. 2. 15, IAEA, 북한 핵사찰 수용 발표
1994. 2. 25, 북한, 3월 1일 사찰 개시에 동의
1994. 3. 3, 미국, 팀 스피릿 중단·3단계 회담 발표
1994. 3. 1~15, IAEA 사찰단 북한 핵사찰
1994. 3. 19, 8차 남북 실무접촉서 북 대표, "전쟁 땐 서울 불바다" 발언
1994. 3. 21, 한·미, 팀 스피릿 훈련 재개 합의. 북한 NPT 탈퇴 강행 경고
1994. 3. 31, UN 안보리, 북한의 추가 사찰 수락 촉구 의장 성명 채택
1994. 6. 2, IAEA, "북한 추후 계측 불가능" 안보리 보고
1994. 6. 10, IAEA, 북한 제재 결의안 채택
1994. 6. 13, 북한, IAEA 공식 탈퇴 선언
1994. 6. 16, 미국, UN 안보리에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 제시
1994. 6. 15~18, 카터 전 미 대통령 방북, 남북 정상회담 제의. 북 김일성 수락
1994. 7. 8, 김일성 사망
1994. 10. 21, 제네바 합의문 체결
1994. 11. 1, 북한 핵동결 선언

제1차 북·미 핵 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의 특징은, 북한이 핵 개발을 체제 수호와 안정의 유력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3년 이전에는 이른바 자위권 차원에서 미국의 핵무기 배치에 맞서 장기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목표로 개발에 나섰다면, 1990년대에는 핵을 만지작거리면서 체제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관계 정상화를 하면, 핵 개발을 접을 수 있다며 협상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협상 전략은 2002년 10월 이후 불거진 제2차 북·미 핵 위기에서도 유효하게 유지되고 있다.

4. 북·미가 산고 끝에 ‘기본 합의’에 서명은 했지만, 합의 이행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체제가 ‘곧’ 붕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더욱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뒤를 이은 ‘고난의 행군’은 그 같은 기대를 더욱 부추겼다. 당연히 미국은 ‘기본 합의’에 소극적이었다. 또 북한의 김정일 체제 역시 조심스러웠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터라 주도권을 쥐면서 국면 전환을 꾀하기란 어려웠다. 여기에는 남쪽 김영삼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대북 정책도 한 몫 했다. ‘기본 합의’가 나온 지 3년이 다 돼 가는 1997년 8월에야 신포의 금호 지구에 경수로 부지 공사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1998년 8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금창리 지하시설’ 핵 의혹을 제기했고, 같은 달 31일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의 시험 발사로 맞섰다. 한반도에 위기는 다시 고조됐고, 이듬해 5월, 미국은 50만 톤 규모의 쌀을 주고 금창리 지하 동굴을 조사했지만, 핵과 무관한 것으로 판명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 외교는 중요한 성공을 거뒀다. 미 의회의 비판 속에 고비를 맞게 된 클린턴 미국 행정부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 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페리 조정관과의 정책 협의 과정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이해시키고 클린턴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1999년 5월,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페리 조정관은 넉 달 뒤 미 의회에 ‘페리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로 정책을 펴야 한다며 ‘북한 붕괴론’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의 한반도는 적잖은 해빙 기류에 들어서게 된다. 경수로 공사는 본격화됐고, 6월에는 첫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 그리고 10월, 북·미 공동 코뮤니케가 나오면서, 100년 숙적 사이의 국교 정상화 가능성이 열린다.

5. “우리가 HEU 계획을 갖고 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HEU 계획을 추진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 있다.” “부시 정권이 이처럼 우리들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취하는 이상 우리가 HEU 계획을 추진한다 해서 무엇이 나쁜가. 그것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억지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김정일 최후의 도박』(후나바시 요이치 지음)이 밝힌 지난 2002년 10월 4일, 북·미의 대화록이다. 당시 부시 미 행정부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평양에 보냈다. 켈리를 만난 북한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이 HEU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부시 새 대통령의 취임은 적어도 한반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세계사적 시각에서 관찰해도)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2008년 1월 현재까지도, 한반도는 7년의 시간을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신보수주의자, 네오콘의 등위에 올라타고 백악관을 점령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최고 권력자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을 국제 정치에까지 반영하고 있는 점은, 놀랍기조차 하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낙인찍었다. 같은 달 미 국방부는 의회에 제출한 NPR(Nuclear Posture Review. 핵 태세 검토 보고서)에서, 핵무기를 사용해 공격할 수 있는 나라에 북한을 집어넣었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 너무 늦게 북·미 관계 개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서는 체제의 위기를 직감했을 것이다. 결국 북·미 모두 대화와 타협이 아닌 대결의 장으로 나서게 됐다. 이후의 상황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체제 변환 시도, 6자 회담을 통한 9·19 공동 성명의 채택, 그와 동시에 시작한 BDA 사태, 북한의 결사적인 저항과 미사일 시험 발사, 미국 민주당의 중간 선거 승리와 의회 장악, 북한의 핵 실험,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 변화, 그리고 2·13 합의와 10·3 합의다. 이 과정에서 남북 관계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어렵게 유지됐다. 또 한·미 동맹은 적잖은 파열음을 내면서 한국 국내 정치에 다양하게 변주됐다.

6. 북·미 핵 문제와 관련해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의 하나가, “이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최근의 핵 신고와 관련해서도 일부 언론들과 한국과 미국의 당국자들, 또 전문가들이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6자 회담을 통해 참가국들은 세 가지의 주요 합의를 이끌어 냈다. 9·19 공동 성명, 2·13 합의, 10·3 합의다. 이 세 합의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바로 ‘행동 대 행동’, 또는 ‘상응 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북한과 미국의 상호 불신이 너무 깊고 크기 때문에, 한 마디로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해서 북한은 어떤 조치를 한다, 동시에 미국은 무엇을 한다, 또 한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은 뭘 한다, 이렇게 나열이 돼 있는 구조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비핵화 2단계 조치로, 북한은 영변의 핵 시설을 불능화하고, 핵 신고를 해야 한다. 미국은 그에 대해 테러 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하고, 적성국 교역법의 적용을 배제해야 한다. 또 미국은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함께 중유 100만 톤에 상응하는 지원을 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볼 것이 있다. 비핵화 2단계 조치의 걸림돌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북한이 영변 핵 시설의 불능화는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 이 점은 부시 미 행정부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로 삼는 것은 핵 신고다. 핵 신고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영변 핵 시설을 활용해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는가, 또 우라늄 농축 계획은 어느 수준인가, 마지막으로 시리아와의 핵 협력이다. ‘클린턴 뒤집기 정책’(ABC, Anything But Clinton)을 표방하며 2차 핵 위기를 기화로 ‘북·미 기본 합의’를 파기한 부시 미 행정부로서는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신의 대북 압박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2002년 2차 핵 위기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가 우라늄 농축 문제였던 만큼, 우라늄과 관련한 신고도 중요하다. 여기에 핵 확산 방지를 안보의 제1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시리아의 핵 협력설도 규명해야 한다. 세 가지 신고 사안 모두 부시 행정부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렵다.

문제는 북한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플루토늄의 정확한 신고는, 북한의 핵 능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플루토늄 양을 알면 핵무기를 몇 개 가지고 있는지 추정이 가능해진다. 우라늄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아무리 국제 사회의 문제국가로 찍혀 있다하더라도, 우라늄 농축을 일관되게 부인해온 북한으로서는 쉽사리 인정하기 어렵다. 시리아와의 핵 협력설도 비슷하다. 이미 핵 확산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북한이다. 재처리 시설과는 관련이 없는 핵 협력이었다 하더라도, 섣불리 신고하기 곤란한 내용이다.

북한에 있어 더 큰 문제는, 미래의 불투명한 보상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른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가정을 해보자. 플루토늄? 미국이 추정하는 50kg에 가까운 40kg을 추출했다고 신고했다고 치자. 우라늄? 130톤의 알루미늄 관을 들여와 3,000여 개의 원심 분리기를 돌리려고 시도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칸 박사로부터 P1, P2형의 원심 분리기를 수입했다, 이렇게 인정했다고 하자. 시리아? 외화벌이도 할 겸해서 영변 원자로와 같은 형태의 것을 기술 이전했다, 그러나 재처리 시설은 지어주지 않았다고 신고서에 적시했다고 하자. 한 마디로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고백성사를 했다고 생각해보자.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될까? “김 위원장, 이제 그대의 죄는 사함을 받았소.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고 사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 부시가 최대한 도와 주겠오.” 이런 극적인 전개가 있을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미국의 보수 강경파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봐라, 북한은 저런 놈들이다. 클린턴 행정부와 기본 합의를 하고도 뒤에서 저런 짓을 했다.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하고 있는 협상도 중단해야 한다.” 미국의 일부 언론들도 이런 식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 또 미 의회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올해 미국은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김정일 위원장의 ‘놀라운’ 고백은,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배제라는 즉각적인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거나, “남은 것은 김정일의 전략적 결단이다”라는 주장은 일종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고, 복잡한 상황을 함께 풀기보다는 책임을 한 쪽에 뒤집어씌우겠다는 얄팍한 잔꾀일 뿐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려면, 부시 대통령은 그에 맞는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한다. 현재의 핵 시설 불능화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다음 달 말, 늦어도 3월 안에 북한은 핵 개발을 위한 물리적 기반을 적어도 1년 동안은 잃게 된다. 핵 연료봉의 해체를 포함해 11가지의 불능화 조치는, 어쨌든 부시 행정부의 외교적 업적이 될 것이다. 여기에 플루토늄과 우라늄, 핵 협력을 포함한 ‘성실한’ 핵 신고는, 북한으로서는 체제 유지를 위해 벌여왔던 미국과의 핵 협상력을 모두 내던지는 게 된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 즉 그 같은 신고를 한다면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궁극적으로는 관계 정상화를 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 거기에는 핵 신고와 관련한 미국 국내 정치로부터의 역풍에 대한 정치적 담보도 포함돼야 한다.

지난달 미국의 힐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는 ‘Dear Chairman'으로 시작해 ’Sincerely Bush'로 끝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은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북한이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친서의 내용을 본다면,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썩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라면, 친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핵 신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플루토늄, 우라늄, 시리아에 대한 성실한 신고가 있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물론 그 같은 신고가 이뤄지면 미국은 미국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기대했던 내용은 그런 형식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친서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귀하(김정일 위원장)가 핵 신고와 관련해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핵 문제 해결의 결정적 전기가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본인(부시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우호적인 미래 관계 수립을 위해 미 합중국 대통령으로의 모든 권한을 사용할 것입니다. 특히 신고와 이후 검증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어떠한 문제도 두 나라의 건설적 관계 수립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북한의 핵 신고가 걸림돌이 되지 않고 핵 문제 해결의 디딤돌이 되도록 하려면,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과 함께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7. 지난해 BDA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우리 정부의 일부 당국자가 BDA 사태의 돌파구로 미국의 연방준비은행, FRB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었다. 당시에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 차원에서 꺼냈던 얘긴데,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실제로 그 방법을 이용했다. 그 결과 BDA 문제를 우회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시 대통령은 핵 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정치적 해결 의지를 잘 보여주는 효과를 거뒀다. 교착 상태에 들어간 핵 신고에 있어서도 그 같은 정치적 결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의 흐름을 보면, 북한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있다. 1월 4일의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북한은, 플루토늄과 우라늄, 시리아와의 핵 협력설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러면서 “모든 참가국들이 동시 행동의 원칙에서 신의 있게 노력하면 10·3 합의가 원만히 이행될 것”이라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부시 미 행정부는 아직 별 움직임이 없다. 북한이 지난해 말로 합의한 신고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공은 북한에 가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 다만 힐 차관보의 입을 통해, 신고 기한을 한국 이명박 새 정부의 출범 전으로 슬쩍 떠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2월 말까지는 북한과 미국 모두 서로의 결단 내지 양보를 요구하면서, 또 한 번의 벼랑 끝 전술로 맞설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둔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이 아닌 중동으로 자신의 외교 역량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초부터 대규모의 중동 순방에 나서면서, 오랜 분란거리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 정착 문제 해결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이란 핵 문제 역시 부시 대통령의 주요 의제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중간 선거 패배와 북한의 핵 실험을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북한과의 핵 문제 해결을 외교적 치적으로 삼겠다는 의도에서 대북 정책의 전환을 가져온 부시 대통령이, 임기 말에 중동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면 북·미 핵 문제는 다시 한 번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만에 하나 그럴 경우, 북한은 부시 행정부와의 협상에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 선거 국면에 따라서는 2006년 하반기처럼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을 또 다시 만지작거릴 수 있다.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아이오와 코커스 결과가 나온 1월 4일에 맞춰 발표한데서도 그 같은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8. 그렇다면 현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과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북·미가 서로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미가 고위급의 특사를 교환해야 한다. 북한은 국방위원회의 고위 인사나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 이상을, 미국은 라이스 국무장관을 특사로 보내야 한다. 특사 교환을 통해 미국은 김정일 위원장이 핵 신고는 물론 궁극적인 핵무기 폐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릴 것인지, 또 그 같은 전략적 결단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역시 미국의 관심을 계속 자신에게 두도록 해 진지한 협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한·미 동맹의 복원을 내세워 북·미의 대결 구도에서 미국에 기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특사 교환을 포함한 모든 외교적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신년 기자 회견에서 밝혔듯, “한·미 관계가 돈독해 지는 것이 남북 관계를 더 좋게 만들”고, “한·미 관계가 좋아지면 북·미 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은 물론 미국에도 얼마나 할 소리를 하고 창의적 해법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공염불이 아닌 실용성을 띠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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