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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자 인물열전

1.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한때 중앙당 중공업부장으로 있었는데 당정책연구실 같은 것을 내오고 그 동무를 거기에 쓰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연과학을 추켜세워야 하겠기에 그를 과학원 원장으로 파견하였는데 사실은 아까운 사람을 내보냈습니다. 나는 강영창동무가 혁명을 위하여 더 일을 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중공업 우선노선을 채택하고 과학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기술혁신을 추진하던 시기에 김일성은 강영창을 정책의 핵심 자리에 그를 임명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 과학기술 정책의 특징이 모두 담겨 있었다. 우선 일제 시기에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해방 직후인 194510월 다른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고급 과학기술자가 드물었던 북의 입장에서 그들의 월북은 환대할 일이었다. 사실 북 과학기술계의 핵심은 대부분 월북한 사람들이 채웠다. 과학원 원사나 후보원사만 하더라도 10명 중 8, 15명 중 9명이 월북한 사람들이었다. 정부 차원의 꾸준한 월북유도사업을 통해 과학기술자들을 모은 결과였는데, 김일성에 의하면 1945년에는 딱 12명뿐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중 한명으로 강영창을 항상 거론하면서 그를 회상하였다.


월북한 이후 강영창은 성진제강소 기사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원철로라는 낡은 강철생산 설비가 있었는데 작동법이 매우 위험하여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노동자 보호정책의 사례로 이곳의 원철로를 폭파시킨 것을 자주 거론하였는데 원철로 없이 립철로 강철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제강법을 마련하여 원철로 폭파 명령을 실현시킨 사람이 바로 강영창이었다. 전쟁 중에는 성진제강소가 수류탄을 비롯 군수물자 제조를 담당하였는데 이를 철저히 집행한 사람도 강영창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책을 철저하게 집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강영창을 기억했던 것이다.



내가 강영창동무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나의 의도를 잘 알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면 적극 지지하였으며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이악하게 노력하였습니다.”



월북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의 실력 때문에 중책을 맡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의 경력, 즉 일제시기 일본인 회사나 연구소에서 일했던 것이나 집안이 부유했다는 점들 때문에 그들은 항상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강영창의 경우 금속공업상에 임명될 당시 출신성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 음해성 투서와 가짜 비밀편지가 남한에서 날아오기도 했다. 이에 김일성은 오랜 인테리 정책을 통해 월북 과학기술자들의 사상성에 대한 의심을 최대한 포용하도록 하였다. 이 정책이 적극 지켜지던 1960년대까지 월북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적절한 지위에서 맘껏 발휘할 수 있었다.


15개년계획에 필수적인 강재지원을 소련이 일방적으로 철회하는 바람에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천리마 운동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15개년계획 집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강철생산을 자체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금속공업상과 로동당 중공업부장을 역임한 강영창은 그래서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김일성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매우 아쉬워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천리마운동을 단순한 노력동원운동으로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인 관찰에 따른 잘못된 평가이다. 천리마운동은 소박한 혁신운동에서 조직력을 극대화시킨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으로 발전하여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이어졌다. 기술혁신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계의 지원이 핵심적이었으므로 1958년부터 과학원은 현장으로 진출하였고 현장활동을 중심으로 과학원 지도부와 정책이 모두 개편되었다. 그 결과 기술혁신운동은 성과적으로 추진되었고 과학원은 생산현장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과학원 조직은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5개년계획을 마무리하고 17개년계획을 새롭게 시작하던 19613월에 강영창은 과학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경제발전계획의 핵심목표인 기술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계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으므로 과학원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그를 원장으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과학원을 비롯한 전체 연구조직 개편 사업이 대략 마무리되고 실질적인 활동이 막 시작되던 1965, 강영창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과학원 활동이 어긋나기 시작해서인지 과학기술계는 1967년 종파사건에도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사상적 불신임이 급격하게 높아졌고 지원도 많이 줄어들었다. 과학기술자들에게 거의 절대적 신임을 보냈던 김일성도 이때부터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신임을 거두어 버렸다.


강영창만 죽지 않았어도 과학기술계가 종파적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과학기술계가 정책의 방향에 부합되게 활동하였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생각했을 것이다. 강영창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원장 임무를 대리했던 사람은 소련에서 전기공업을 전공한 전두환 부원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