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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18.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60년대 초 어느 날, 대안전기공장 제관직장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혁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사로 나선 기술부의 기사장은 기술혁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이라도 불합리하거나 불편한 것을 수정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과학기술을 잘 아는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업방법에서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직접 생산을 담당한 노동자들이 잘 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과학기술 내용과 관련한 부분은 기술부에서 얼마든지 뒷받침해 줄테니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제안해달라고 당부하였다.


제관직장의 리시윤은 강연을 들으면서 오늘 하던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았다. 다양한 용량의 변압기를 만들면서 용량별로 케이스 모양과 작업 방법이 모두 달라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도 변압기를 만들 때마다 왜 모두 모양이 다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투덜댄다는 것이 기억났다. 케이스 모양만이라도 하나로 통일된다면 작업효율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강연을 듣고 나오는 길에 자기 직장 담당 기술자인 리방록 기수에게 물었다.


 

기수 동무, 우리 작업반에서 만드는 변압기 말입니다. 모양이 제각각인데 여기에 무슨 과학기술적 비결이라도 들어있는 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꼭 알아야겠다면 내일 설계부에 들러 제가 한 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리방록 기수는 싱글벙글하면서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리시윤을 찾아왔다.



비결을 알아냈습니다. 변압기 모양이 다른 까닭은 변압기를 설계한 사람이 모두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만들고 있는 변압기는 모두 외국의 것을 그대로 본뜬 것입니다. 용량별로 모두 다른 나라의 변압기를 본뜬 것이라 모양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지요. 확인해보니 우리 변압기에는 모두 7개 나라의 변압기 형체가 섞여 있더군요.”


허허... 그러니까 나라가 다르듯 변압기 모양도 달랐다는 말이군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 모양에 과학기술적 비결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으니... 모양을 만드는 것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약간이라도 모양이 달라지면 품질검사에 걸리므로 이를 바로잡는데 시간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릅니다. 이제보니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일이었군요.”


그렇지요, 교조주의라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기수 동무, 변압기 모양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고치는 것이 어떨까요? 변압기 설계를 통일시키면 작업능률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매번 형틀을 바꾸고 바뀐 작업방법을 숙지하는 것만 줄여도 그게 얼마입니까?”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제 기사장 동무가 강조한 기술혁신입니다. 실제 작업을 담당하는 여러분들이 불편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점에서 기술혁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시윤동무, 한 건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밤에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우리 기술부에서 급히 회의를 열어 새로운 변압기 형체를 고안해서 설계를 통일시키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역시 우리 기술자들은 속도가 빠르군요! 그럼 이번에 다른 나라 방식이 아니라 우리식, 조선식 변압기를 만들게 되는 셈이네요.”


그렇지요. 조만간 기술부와 설계부에서 기술자들을 이곳으로 파견할 것입니다. 함께 힘을 모아 만들기 쉽고 모양도 아름다운 조선식 변압기를 만들어봅시다.”

 


용량별로 달랐던 설계를 통일시키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설계통일 과정에서 단순히 모양만 통일시키지 않고 불필요한 부분이나 작업공정을 줄일 수 있는 방안까지 반영하였다. 그 결과 변압기 크기는 평균 30% 작아졌고 별도로 용접작업을 해서 붙였던 냉각기를 케이스에 일체화시켰다. 작업시간도 평균 1/3 이상 단축할 수 있었다. 즉 재료 사용량을 줄이고 작업 시간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질이나 모양은 훨씬 좋아진 것이다.


1950년대 말, 60년대 초 북한의 생산현장에서는 우리들의 예상과 달리 기술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직접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현지연구사업이후 현장에 파견된 과학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술혁신 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나 새로운 설비의 발명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업방법의 개선,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작은 도구, 공구의 개발 등을 주로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