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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자 인물열전

4. 계응상-1호 박사

계응상-1호 박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49년 초가을, 중앙잠업시험장으로 김일성이 급히 찾아왔다. 당시 중앙잠업시험장과 원산농업대학에서는 교육성 부상, 농업성 잠사국 국장 등으로 구성된 검열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검열단이 1주일 동안 료해사업을 진행한 끝에 중앙잠업시험장 장장(場長)이면서 원산농업대학 잠학부 부장인 계응상을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일성이 급히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래, 계응상 동무를 철직시킨 이유가 뭡니까?”


,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번에 잠업시험장에서 개발하여 보급한 국잠43’, ‘국잠47’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 누에는 생활력이 약해서 병이 돌아 수확을 하지 못한 농가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더 치명적인데, 그가 연구를 위해 소련에서 부르조아 학문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서구 유전학을 적극적으로 익혔으며 모건 유전학 실험의 주요 소재였던 초파리를 유전학 강의에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서구 부르조아 학문을 추구한 그의 사상성이 의심스러워 우선 보직을 해임하고 사상검열을 진행하려던 계획이었습니다.”


동무, 과학자들의 사상성을 검열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부 연구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고 과거 그들이 일제 기관에서 일했던 잘못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연구를 하다보면 항상 성공만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야 합니다. 또한 그들도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억압과 차별을 경험했고 이데올로기적 지향까지는 아니지만 반제국주의에 대한 신념은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도록 도와주기 위해 밤낮을 잊고 연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이미 소련에서 부르조아 학문이라고 판명한 서구 유전학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소련의 결정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소련은 소련의 실정이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실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론이든지 그의 진리성이 확증되자면 그렇게 인정할 만한 충분한 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논거들 중에서도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고 인민들에게 파악된 진리보다 더 위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계응상 선생은 새 조국 건설에 절실히 필요한 훌륭한 비단실누에품종을 수많이 육종하여 우리의 수백만 농민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우리 인민들이 명주옷뿐만 아니라 비단옷을 입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하는데서 이렇게 특출한 공로를 세운 과학자를 조그마한 실수를 이유로 반동학자라고 규정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잠업시험장을 해산시키려는 추태까지 부렸습니까? 이는 본인의 동참의지만 충분하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누구든지 새 조국 건설사업에 동참시키자는 정부의 새로운 인텔리 정책에 반하는 것입니다. 당장 회의를 열어 이번 결정을 재고하십시오.”


 

이번에 논란된 계응상은 교잡을 통한 누에 품종 개량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는 피마잠 누에를 비롯하여 북의 기후와 환경에 맞는 누에를 여러 종 개발하였다. 1925년 규슈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였고 1930년대에 중국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귀국한 그는 1946년에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농학부 교수, 중앙잠업시험장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북에서 수여한 1호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김일성대학 농학부에서 분리된 사리원농업대학의 잠학부 초대 학장을 맡았다. 사리원농업대학은 뒤에 원산농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계응상의 업적을 인정하여 계응상농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 김일성의 지원으로 철직의 위기를 넘긴 계응상은 정부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그는 1952년 개원한 북 최고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인 과학원의 농학 분야 원사 1호가 되었고, 1952년 국기훈장 제3, 1953년 로력훈장까지 받았다. 게다가 1960년에는 인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는 등 1967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북 과학계에서 최정상급의 대접을 받았다.


계응상은 북 과학기술자로서 최초로 개인 선집인 계응상선집 1~3을 출판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는 앞서 소개했던 북 최고의 과학기술자 리승기도 누리지 못한 대접이었다. 아마도 개인 이름을 단 선집은 김일성선집 이외에 처음인 듯하다. 그리고 계응상선집 이후에 김정일선집이 나왔다.


당시 김일성이 계응상을 복권시키는 모습은 그가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당시에는 상당히 현실적인, 실용적인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북에서 사회주의 조국으로 인식하고 있던 소련에서는 당시부터 1960년대까지 서구의 유전학, 즉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유전학을 금지하고 있었다. 대신 유전자나 유전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신유전학이라는 학문을 채택하였다. 이는 학문적 성과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리센코라고 하는 학자가 국가권력의 힘을 빌어 강제한 것이었다. (이후 리센코사건황우석 사건과 같이 과학기술 이론에 대한 평가가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판단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김일성은 계응상의 누에 품종 계량에 대한 실력과 의지를 높이 사면서 그를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중용하였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북 경제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처럼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력 및 구체적 실행 결과로 그들을 평가하던 최고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실력보다 이데올로기가 앞서지 않았다면, 혹은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약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면 북의 역사는 분명 지금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최근 북에서 주창하는 과학기술 중시사상은 이러한 정책적 실수를 반성한 결과물이며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결과 ‘CNC 기술의 확보에 성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