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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자 인물열전

5.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전후복구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547월 중순, 김일성이 길주에 있는 펄프공장을 현지지도차 방문하였다. 당시 길주펄프공장에는 전쟁 시기 월북한 화학공학자 마형옥이 기술지원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형옥 선생,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 수상 동지. 이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펄프공장을 정상화시키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나라를 빠른 시일 내에 강력한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일으켜 세우는 데 선생과 같은 과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 시기 북으로 올라오는 동안에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서는 다닐 수 없었는데 나라의 크나큰 배려로 치료를 계속 받아 이제 병이 거의 다 나았습니다.”


건강해졌다니 나도 기쁩니다. 건강을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나저나 지금 와서 보니 공장은 얼추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데 원료 문제는 없나요? 공장에서 생산하는 종이와 인견펄프를 이전에는 무엇으로 생산하였지요?”


, 안 그래도 요즘 저희들이 고민이 원료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주원료로 삼송(전나무)을 많이 썼습니다. 일제 놈들이 닥치는 대로 주변에 있는 전나무들을 찍어 썼기 때문에 이제 나무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쟁 시기 무차별 폭격으로 숲들이 많이 불에 타버렸지요.”


전나무와 같은 침엽수들은 지금 심는다 하더라도 자라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전나무는 몇 십 년 이상은 자라야 쓸 만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마 선생, 우리나라는 기후가 맞지 않아 목화도 잘 안 됩니다. 그리고 경지면적도 제한되어 있어서 섬유문제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학공학의 힘을 빌어 섬유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기존의 나무 원료로만 인견펄프를 생산하려 말고 아무 나무를 가지고도 섬유를 생산할 수 있게 연구를 하여야 합니다.”


... 저희들은 우선 공장의 설비들을 수리하여 정상화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느라 다양한 원료를 쓰는 것에는 아직 대비를 못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다른 원료를 사용하여 인견펄프를 생산하는 기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생각을 기존의 틀에만 묶어두면 안 됩니다. 조선 사람은 조선의 자연을 뜯어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기 있는 백양나무와 같은 기르기 쉽고 빨리 자라는 활엽수나 강가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갈대를 가지고 인견펄프를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한 정보의 땅에 갈을 심으면 20 정보의 땅에 목화를 심는 것과 같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여유가 없어서 생각을 못해 보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가능할 듯합니다. 어차피 인견펄프가 식물의 섬유소를 정제해서 만드는 것이므로 다른 나무를 쓴다 하더라도 정제 방법만 잘 찾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마 선생, 중앙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백양나무나 갈대를 이용하여 인견펄프를 생산하는 연구를 곧바로 시작해 주세요.”


 

대북제국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마형옥은 1942년에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연구생으로 있다가 해방된 다음 귀국하여 경성대학(이후 서울대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경성대학에는 비날론이라고 하는 새로운 합성섬유를 개발한 리승기가 함께 있었는데 그가 전쟁 직후 월북할 때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형옥도 북으로 올라갔다. 월북 당시 건강이 좋지 못하였던 마형옥은 후방에서 요양을 하다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자신의 고향인 김책에서 가까운 길주의 펄프공장 복구 정상화 사업을 맡고 있다가 김일성에게 갈섬유연구사업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에 김일성이 갈섬유연구사업을 지시할 수 있었던 까닭은 길주펄프공장 방문 직전에 방직, 방적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여러 상황을 점검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장들을 복구하여 정상 가동하게 되면 연료문제가 걸릴 수 있다는 것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도당열성자 회의를 열어 원료문제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원료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났던 것이다. 이미 면화나 기타 작물을 길러 섬유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공업적 방법으로 섬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리승기에게 비날론 공업화를 통해 합성섬유를 대량생산할 것을 지시하였고 동시에 마형옥에게는 천연소재를 공업적으로 처리하여 인견섬유를 대량생산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농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당시의 정책적 노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마형옥이 막상 갈섬유연구사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각종 실험 설비며 연구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런 문제를 정리하여 요구하기도 전에 중앙 정부에서는 실험에 필요한 각종 설비와 시약 등을 비행기로 공수해주었고 다른 부문에 배치되어 있던 연구사들도 적극적으로 새로 배치해주었다. 이처럼 갈섬유생산연구는 중앙에 의한 적극적 지원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당시 배치되었던 연구사들 중 일부는 1952년 이후 전선이 고착화된 다음 전선에서 후방으로 재배치된 대학생과 연구사들이었다. 과학기술자 보호, 육성 프로그램을 일찍부터 가동한 결과 마련된 인재들이었다.


갈섬유 생산방식은 이론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공업화 단계에서 효율을 높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다.


적당한 목재 또는 무명의 부스러기 등을 화학적으로 적당하게 처리하여 순수한 섬유소로 이루어진 펄프를 만들고 이를 화학적으로 용해하며 다시 섬유상으로 응고시키는 인견섬유 제작 방식은 20세기 초에 이미 일반화된 방법이었다. 게다가 신의주 지역에서는 1930년대 말에 이미 인견스프 생산공장이 설립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화학공학을 전공하기는 하였지만 섬유생산연구를 수행한 경험이 없었던 마형옥과 연구집단은 상당히 고생하면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2년 동안 1500여회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실험실적 연구에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19564월에 진행한 3차 당대회에서 갈섬유생산에 대한 과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였다.


실험실적 연구 다음 단계인 확대시험장치는 평양에 설치되었다. 이것 역시 2년이 지난 19584월에 성공했다. 1958년은 1957년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이 위력을 발휘하여 경제성장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 15개년계획을 대폭 수정한 시기였고 연구 중에 있던 사업을 대규모 공업화 단계로 갑자기 전환하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리승기의 비날론 공업화 사업이었고 합성고무 생산연구사업과 무연탄 가스화 생산연구사업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갈섬유생산사업도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해나갔다. 김일성은 압록강 하구 일부에 만들고 있던 간석지에 대규모 갈밭을 만들어 인견펄프 원료를 마련하라고 주문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석지가 비단섬이라고 불리는 신도군이다. 최근 중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황금평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일제 시기 형성되었던 제지, 펄프 생산 공장을 활용하여 신의주 지역에 대규모 섬유공장을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의 터가 이 당시에 잡혔고 마형옥은 이곳에 갈섬유 생산을 위한 생산적 쿠모를 가진 큰 중간공장을 건설하였다. 실험실적 연구, 확대시험장치 연구를 거쳐 대규모 공업화 생산을 위한 마지막 단계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간공장 시험 단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불순물인 갈회분을 없애는 것과 갈섬유 원액인 비스코스의 여과성을 높이는 문제였다. 갈은 나무보다 회분을 비롯한 기타 불순물이 훨씬 많았고 이를 처리하는 공정이 매우 어려웠다. 연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60년까지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1961년에 개최하려고 북이 야심차게 준비하던 제4차 당대회는 자신들이 채택한 노선과 경제발전 전략, 그리고 구체적인 사업과 그 수행능력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최대한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와야만 했으므로 김일성은 갈섬유연구집단을 평양으로 불러 연구를 더욱 다그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60년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구집단들이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려고 무리를 하던 시기였다. 비날론 공장 건설도 이 시기부터 급격하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였고 컴퓨터 제작 연구집단도 급히 꾸려져 실제 제작에 들어갔다. 많은 사업들이 1961년을 제한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결국 갈섬유생산연구는 1961년에 중간공장 시험단계 연구가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성공이었기보다 정치적 일정에 맞추어 연구를 일단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순물 제거와 여과성 향상이 목표치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공장을 만들어 가동하면서 성능을 높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중간공장 시험연구가 일단락됨과 동시에 공장 건설을 위한 ‘100일 전투가 전개되어 생산시설이 급격하게 구축되었다. 그 결과 신의주섬유공장은 1961년에 년산 1만 톤 규모의 펄프생산시설을 갖출 수 있었고 1964년는 스프사 공장을 완공할 수 있었다. 갈섬유 원료를 제공하던 비단섬은 최근 원유매장 사실이 밝혀져서 경제적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마형옥은 1963년부터 1985년까지 과학원 화학섬유연구소 소장과 고문을 역임하였고 1964년에는 노력영웅 칭호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72년에는 1972년 김일성상을 받았고 국기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