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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8. 집단적 기술혁신운동 : 북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

1950년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도 '기술혁신'체제로 봐야 하는데, 하물며 2020년의 북한은? 더 후퇴했을까? 거의 최고 수준의 기술(기계, ICT, 연료, 제어계측, 소재 등)을 요구하는 ICBM과 SLBM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곳을?

북한 경제 분석을 여전히, 수출입 통계와 탈북자 인터뷰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건 당연한데, 그럼 어떻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을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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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기술혁신운동 : 북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913일에서 16일까지 평양에서는 전국 생산혁신자 대회가 열렸다. 북의 경제활동은 이 대회를 기점으로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195899공화국 창건 10주년기념행사를 하면서 당시까지 전개해온 ‘10주년 기념 사회주의 경쟁운동을 마무리하고 이 운동을 통해서 시험적으로 시행되었던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대회였다. 북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인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 공론화, 전면화된 대회였다.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란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의 질적 성장을 의미하는 기술혁신운동과 북 특유의 위기 돌파 전략인 집단주의를 결합한 것이다. 이는 1957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경쟁운동을 북 지도부가 발전시킨 새로운 대중운동이었다.


전후 첫 경제발전 계획인 15개년계획이 시작과 동시에 원조가 끊기면서 위기에 처했으나 예상하지 못한 노동자,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의해 원래 기획된 1957공업 총생산액 성장률’ 22%보다 2배 많은 44%를 달성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소련 등의 원조를 받지 않고!


예산 수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던 원조가 끊김에 따라 15개년계획을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김일성은 최종 목표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대신 줄어든 예산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내부 예비를 개발하여 철저히 이용하고, 더욱 절약하며, 최대한 증산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원은 더 적게 하면서 생산은 더욱 많이 하라는 지도부의 요구에 대해 중간 관료층에서는 반발이 심했지만 김일성을 비롯한 최고 지도부의 적극적인 호소에 반응한 기층의 노동자, 농민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적극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대중들은 단순히 노력동원을 강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나 작업 방법의 개선을 통해 생산방법 자체의 질적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57년에 계획을 2배나 초과달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개별적 기술혁신운동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일찍부터 간파한 북 지도부는 195831차 당대표자회를 열어 수정된 15개년계획을 추인하였고 기술혁신운동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581월부터 뛰어난 과학기술자 집단인 과학원을 생산현장으로 진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조직화시키면서 집단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를 공유하기 위해 개최한 대회가 바로 전국 생산혁신자 대회였다.


대회 마지막 날, 김일성은 사회주의건설에서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반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강화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기술자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기술혁명이 중요하고 기술혁명은 금속공업, 화학공업, 기계공업의 발전이 핵심이라고 하면서 현재의 경제정책까지 연결시켜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발전상에서 사회주의 공업화와 기술혁명, 경제정책을 정리한 다음, 연설의 핵심인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고 집단주의라는 개념이 추상적인 것이므로 좀 더 쉽게 설득하기 위해 비유적인 설명방법을 도입하였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혁신운동을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자는 것입니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웅이 많다고 걱정하는데 나는 영웅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조선 사람이 다 천리마를 타고 다 영웅이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 것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에서 혼자서 애를 써서 안 되는 일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사람이 지혜와 힘을 합쳐서 혁신을 일으키면 거기에 참가한 사람은 다 혁신자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당은 집단적 혁신운동을 널리 전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개인적 기술혁신과 집단적 기술혁신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기술혁신을 달성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목표라는 설명이다. 특히 기술혁신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학기술자와 생산혁신자들의 개별적인 실험, 연구활동에 대해 집단이란 형식을 통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하는 좌경적 편향을 고려하여 혼자서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을 개인영웅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에서 연구, 개발 활동에 대한 평가가 논란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영웅이라는 선동성이 강한 단어를 사용하여 집단주의가 단순한 평준화가 아니라 상향 평준화를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에서 집단적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면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지향을 설명한 다음, 김일성은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전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로동자들과 기술자들의 합작이었다.


 

기술자들이 로동자들의 창발성을 도와주지 않고 배척하는 옳지 않은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기술자들이 로동자들의 좋은 의견을 받아 가지고 발전시킨다면 더 훌륭한 발명이나 창안이 나올 수 있는데 로동자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술자들은 응당 로동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로동자들은 기술자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창안은 로동자들에게서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로동자들이 직접 기계를 다루며 어떻게 하면 생산을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겠는가를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고 더 완전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로동자들과 기술자들의 합작을 강화하여야 합니다.


 

과학기술자들이 하는 궁극적인 역할이 바로 생산활동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과학기술자들이 노동자를 도와주는 것을 응당그렇게 해야 하는 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과학기술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생산활동에 누구보다 정통해 있기 때문에 생산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 활동에서도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간결하게 설명된 과학기술자들의 역할과 활동방법, 그리고 과학기술 발전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은 이후 북 과학기술의 독특한 특징인 현장지향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 과학기술자와 노동자의 협력이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김일성은 그 이유를 보수주의와 소극성에서 찾았다. 이는 연설문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으로 핵심주제에 해당한다. 여기서 보수주의와 소극성은 일반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과학기술자들, 좁게는 과학원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그릇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보수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첫째로 그들(일부 과학기술자들)은 신비성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공업이 신비하다, 과학이 신비하다, 기술이 신비하다, 기계가 신비하다고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알 수 없으며 자기만이 과학도 공업도 기술도귀신처럼 안다는 것입니다. 과학원의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란 한두 해에는 연구할 수 없으며 적어도 1020년 걸려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10년이 지나가도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을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 자체가 신비성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로동자와 기술자들은 철콕스를 생산하고 갈대와 강냉이대로 섬유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고 농민들은 벼랭상모와 목화영양단지가식법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혁신을 일으키고 있는데 과학원의 일부선생은 과학이 신비하고 기술이 신비하니 함부로 연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밑줄은 인용자)


 

이렇듯 김일성은 이례적으로 과학원 내부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과학원의 현장진출에 대한 반대의견을 직접 비판하였다. 당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발전, 나아가 사회주의 공업화의 달성에서 과학원의 현장 진출과 역할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김일성이 강조한 것이다. 이런 김일성의 인식은 195811월 과학원의 조직 개편과정에 깊이 반영되어 지도부가 대폭 교체되게 하였다.


김일성은 과학기술자들의 현장활동과 관련한 논쟁을 이어가면서 주체에 대한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듬어나갔다. 과학기술자들의 보수주의와 소극성의 근원이 일제 식민지 지배의 결과라고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대항 논리로 주체를 내세웠던 것이다. 아래 글은 주체라는 말이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명백히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 잔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그래도 나는 그전에 일본의 모모 대학을 다녔는데 당신들이야 무엇을 아는가?고 하면서 일제 때의 공칭능력을 추켜 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내리 누르려고 합니다. 우리는 더 빨리 나가기 위해서 앞선 나라인 쏘련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우수한 경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구라파 나라들의 것은 무조건 다 선진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덮어놓고 우상화하는 나머지 자신이 쌓은 선진적인 경험이나 커다란 성과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것은 배워야 하지만 자기의 좋은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의 것만 다 좋고 자기의 것은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사상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또한 남의 기준량을 내걸고앞선 나라의 기준량이 이러하니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근로자들의 창발성을 마비시키려고 합니다. 이것도 위험한 경향입니다.

 


원래 주체의 개념은 195512월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소련파를 사상적인 측면에서 비판하면서 주체라는 개념이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는 8월종파사건으로 시작된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수정주의적 편향이라는 비판이 강해짐에 따라 반종파투쟁이 일단락되는 1958년부터 주체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원의 현장 진출이 시작된 후 자체적인 과학기술의 강화와 더불어 과학기술적 성과들이 하나 둘 가시화되면서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는 오히려 조금씩 주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주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 강해진 상황에서 비판의 세기를 줄이기 위해 주체라는 말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과학기술 분야의 구체적인 성과들을 바탕으로 논리를 좀 더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학기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경제 활동에서 거둔 결과들을 주체 개념에 대한 물질적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주체 개념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이 당시 북한의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기계공업에서 거둔 성과들로 인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명확한 대비효과로 인해 이 구절은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주의를 비판할 때 주로 인용되었다.


 

기계공업이 신비하다고 하는데 우리도 처음에는 그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알고 보니 거기에는 신비한 것이란 없습니다. 쇠를 깎아 기계를 만드는 것이 무엇이 신비하겠습니까? 대패로 나무를 깎는 것이나 선반으로 쇠를 깎는 것이 리치상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노력만 하면 최신설비를 가지고 있는 우리 기계제작 공장들은 여러 가지 중형기계들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국 생산혁신자 대회의 이름을 관심 깊게 살펴보면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변화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당시까지는 천리마라는 말이 수사적 표현이었을 뿐 1959년 이후 공식화되는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에 참가한 사람을 가리키는 천리마기수라는 표현도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이 대회에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핵심인물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핵심을 지칭하는 생산혁신자로 불리고 있었다.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형식과 내용은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이를 가리키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한 번 더 변화의 계기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변화는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교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일어났고 새로운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형식과 내용에 맞춰 새로운 이름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