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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사무소 대신 남북전략회의를 만들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논의하자- 북한의 13차 정치국 회의 내용에서 남북 대화 실마리를 찾자 연락사무소 대신 남북전략회의를 만들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논의하자- 북한의 13차 정치국 회의 내용에서 남북 대화 실마리를 찾자 2020.06.22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어 사라졌다. 남북 정상 사이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던 연락사무소는 지난 2년간 거기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가,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폭파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또한 이것이 사라짐으로 인해 사사건건 남북 사이의 일을 발목 잡아왔던 한미워킹그룹(실무그룹)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연락만 주고받다가 끝나버린 듯한 연락사무소보다 실무를 수행했던 한미워킹그룹이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 시작했다. 남북 사이의.. 더보기
북한-과학기술, 선입견에 빠져 보지 못했던 북한의 모습-201809-물리학과 첨단기술 -.. 북한-과학기술, 선입견에 빠져 보지 못했던 북한의 모습-201809-물리학과 첨단기술 - 한국물리학회 북한과 과학기술이라는 단어의 조합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헐벗고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MB)을 자체적으로 개발, 완성한 것만 하더라도 북한의 과학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을텐데 왜 북한과 과학기술의 조합은 낯설게 느껴질까?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작동했던 체제 대결의 논리, 즉 북한이라.. 더보기
6.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황해제철소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황해제철소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Freie Universität Berlin Institut für Koreastudien, Affiliated Fellow) 황해제철소는 일제 시기인 1914년에 미쓰비시 재벌에 의해 설립된 겸이포제철소를 전신으로 하여 세워졌다. 대동강을 끼고 설립된 황해제철소는 동해에 세워진 김책제철소와 더불어 북의 대표적인 제철소이다. 북이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대부분의 생산 설비가 그렇듯, 황해제철소도 해방 직후에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다가 1948년 즈음이 되어야 재가동되기 시작하였고 1950년 전쟁이 터지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어 다시 가동이 중단되었다. 1953년부터 진행된 전후복구사업의 최우선과제로 제철소 복구사업이 채택되어 일부 직장이.. 더보기
북한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기초과학연구원_블로그 투고) 올해 글을 많이 쓰겠다고 마음 먹어서 그런지, 원고 청탁이 조금 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과학기술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을 써봤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을 소재로 시작해달라고 해서 드라마도 봤는데... 북한 연구자인 제가 보기에는 불편한 모습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고 하니 그건 다행인 듯하네요. --- 북한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기초과학연구원_블로그 투고) ​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던 윤세리(손예진 扮)는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북한에 불시착한다. 물론, 드라마답게 이곳에서 ‘찐’ 사랑도 만난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설정이다. 드라마의 인기는 사람들 마음 속 북한에 대한 호기심도 피어 오르게 했다. ‘~씁네다’, ‘~다.. 더보기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3/3) : 1990~2010년대 말.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 라는 계간지에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라는 글을 썼습니다. 간추리긴 했지만 조금은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써서 발표하지 않은 1970-80년대 이야기와 최근의 북한 경제, 사회의 변화를 부문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썼습니다. 북한 사회가 더디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빠르게 혁신 친화적인 체제로 변하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3년주기설, 그리고 스핀오프 전략의 실행 등을 이야기만 하고 글로 많이 쓰지 않아 대략의 흐름을 써봤습니다. -----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ᄉ.. 더보기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2/3) : 1960~90년대중반.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 라는 계간지에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라는 글을 썼습니다. 간추리긴 했지만 조금은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써서 발표하지 않은 1970-80년대 이야기와 최근의 북한 경제, 사회의 변화를 부문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썼습니다. 북한 사회가 더디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빠르게 혁신 친화적인 체제로 변하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3년주기설, 그리고 스핀오프 전략의 실행 등을 이야기만 하고 글로 많이 쓰지 않아 대략의 흐름을 써봤습니다. -----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ᄉ.. 더보기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1/3) : 1940~60년대초.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 라는 계간지에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라는 글을 썼습니다. 간추리긴 했지만 조금은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글로 써서 발표하지 않은 1970-80년대 이야기와 최근의 북한 경제, 사회의 변화를 부문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썼습니다. 북한 사회가 더디지만 우리 생각보다는 빠르게 혁신 친화적인 체제로 변하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3년주기설, 그리고 스핀오프 전략의 실행 등을 이야기만 하고 글로 많이 쓰지 않아 대략의 흐름을 써봤습니다. -----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ᄉ.. 더보기
10.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1958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과학 연구 사업에 대한 토론 안건이 올려졌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기술지원활동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나 당 상무위원회에서 직접 과학기술 정책들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은 특별히 합성고무 연구사업에 대한 사업 보고가 계획되었다. 한 달 전에 드디어 합성고무연구가 완성되어 중간공장건설을 비롯한 사업진행을 검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난 전쟁 시기부터 합성고무 생산을 위한 연구에 깊은 관심을 돌려왔습니다. 당시 청수로 피해있던.. 더보기
13.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공장대학 :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 강화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근로대중이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게 하라. 1957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예상치 못한 근로대중들의 호응(이후 천리마운동으로 이름붙여졌다.)으로 인해 2년 반만에 초기 계획이 달성되었다. 계획 시행 1년 만에 초기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여 1958년 3월, 급히 소집한 제1차 당대표자회는 초기 계획을 수정하여 제1차 5개년계획을 1년 앞당긴 1960년에 마무리짓고 새로운 장기 계획을 1961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계획된 것이 제1차 7개년계획이다. 1967년.. 더보기
최근 북한 과학기술 정책 이해를 위한 간략한 소개 최근 북한 과학기술 정책 이해를 위한 간략한 소개 2020년 정면돌파전에서 '과학기술'이 아주 중요해졌지요. 그래서 1월부터 로동신문 등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강조 기사가 아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에 대한 해석 기사들에서 잘못된 해석이 많더군요. 역시 북한 이야기에서 과학기술만 등장하면 이상해지는건 여전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몇 가지 이야기 몇 가지를 수정해드립니다. *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는 최근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길게는 1940년대부터 시작된 겁니다. 과학기술은 고담준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생산현장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지향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제가 쓴 ‘현지연구사업’ 관련 글을 보시면 잘 나옵니다.) 짧게는 1980년대 말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