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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2) 과학기술로 북한읽기 3

20200101-7기5차전원회의 결정에 대한 단상1 : 1956년 12월 상황과 비교

7기 5차 전원회의 결정에 대해 분석이 분분하다. 특히 새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고 전회회의 결정문으로 대체한 사례가 1957년에 딱 한 차례만 있었다면서 1956년 상황에 빗대어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기사가 몇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1956년 말 상황이 약간 틀린 부분이 있어, 이 당시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쓴 사람으로 조금 자세하게 쓸 필요가 있을 듯하다. (1956년 말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이 벌어지고,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이 형성되던 당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어보려던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은 분은 '북한 과학기술형성사 1' (선인, 2007)을 보시기 바랍니다.) 

1956년 12월 상황은 8월에 있은 종파사건과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다. 김일성 권력에 도전을 한 '8월종파사건'은 이미 9월 즈음 일단락되었다. 이때 생긴 위급한 상황은 1957년부터 추진할 계획에 대해 소련이 원조를 급히 줄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것도 11월 말, 12월 초에 갑자기 연락해서 약속했던 원조를 모두 해줄 수 없다, 축소해야겠다는 통지를 했기 때문이었다. 

전후복구사업 기간(1954~1956) 동안 북한 예산 수입의 1/4가량을 차지했던 해외 원조가 급격히 줄어 들었는데, 소련은 10억 루블 가량을 지원하다가 절반인 4억 7천만 루블로 줄였다. 특히 북한의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압연강재 지원을 갑자기 2만톤이나 줄여버리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1957년 북한의 압연강재 생산량이 13만톤에 불과했으므로 2만톤 지원 축소는 경제발전 전략에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이처럼 전후복구사업을 끝낸 이후 처음으로 정상 경제계획(1차 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려던 상황에서 소련의 비협조 통보를 받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1956년 12월에 있었던 것이다. 

12월 11일에 열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예산 수입이 축소된 상황에 맞게 목표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고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히려 8월종파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변했던 인민생활 향상 부분을 높인 것까지 고려하면 목표는 더 높아졌다. 일종의 '저투자-고성장' 전략을 택한 것이다. 

'저투자-고성장'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혁신(그것도 기술혁신)을 적극 내세웠다.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전원회의 결과,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중요 생산현장을 나누어 맡아 직접 현장에 나가 근로대중들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북한에서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던 압연기를 가진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를 맡았다. 그는 12월 27일에 강선제강소에 나가, 원래 8만톤 계획이었던 것을, 소련 지원 축소분을 고려해 9만톤 생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강선제강소 로동자들은 새로운 예비를 찾아 오히려 3만톤이나 더 많은 12만톤을 1957년 한해동안 생산해내었다. 이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진행된 혁신운동인 '천리마운동'의 시작이었다.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과학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고급과학기술자들을 현장에 적극 진출시켜 생산현장의 기술혁신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결정에도 과학기술 강조가 들어간 이유와 같다. 자력갱생을 제대로 하려면 과학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북에서 천리마운동을 거론한다면 이는 '기술혁신'운동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노력동원정책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부를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다.) 

 

이번 5차 전원회의에서 북은 1956년처럼 극심한 외부 제약을 자력갱생 정신으로 돌파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그 속의 대책으로는 천리마운동 당시처럼 일반인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기술혁신이 자리잡고 있다. 이번 결정에서 이를 살펴봐야 제대로된 북의 정책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