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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23.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과학기술정책의 후퇴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Institut für Koreastudien Freie Universität Berlin, Affiliated Fellow) “학자들이 당정책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의도를 똑똑히 모르고 있으며 그들 속에서 우리 당의 사상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좋지 못한 현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인테리들 가운데는 《항일빨지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소설 보듯 한번 훑어 읽으면 다 알 수 있는데 무엇을 자꾸 연구하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상기를 학습하라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 혁명가들의 풍모, 그들의 사업방법과 사업작풍, 혁명가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배워.. 더보기
4.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12월 29일,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구성되어 있습니.. 더보기
3.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2년 4월 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는 공업화는 불가능하니까요. .. 더보기
2.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북 과학기술계의 초석, 월북 과학기술자 강호제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47년 어느 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경성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있던 리승기에게 북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리 선생, 이번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생과 같이 유능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쓰지 못하고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능력과 신망이 이정도 뿐인 것을...” “리 선생, 그래도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실 겁니까? 북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제자를 길러냅시다. 그리고 선생이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해서 우리 인민들이 따뜻하고 예쁜 옷을 부족함 없이 맘껏 입을.. 더보기
10. 광명성 3-2호(2012.12) : 과학기술 논리로 정치를 읽다. 강호제 (겨레나하 평화연구센터 소장)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화성 12형, 북극성 2형시험발사를 보면서 2012년 상황이 떠올랐다. 광명성 3-2호가 떠오르면서, 그때까지 따라붙던 '실패'라는 꼬리표가 사라지고, 북미 사이의 협상이 시작된 흔적이 보였던 시험이었다. 이번엔 북미 사이의 협상이 시작된 흔적이 보이고미사일(그때는 인공위성)이 떠올랐다. 협상의 출발점을 더 이상 내리지 말라는 비언어 의사소통 과정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때 쓴 글을 올립니다. '과학기술로 북한읽기 1' 오타 교정본입니다.------ 광명성 3-2호(2012.12) : 과학기술 논리로 정치를 읽다 필자는 2012년 4월, 광명성 3호 발사가 실패했을 때 ‘10개월 안에 재발사될 것'이라는 분석글을 프레시안에 게재한 .. 더보기
3.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도상록-북한핵물리학의 아버지 강호제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1946년 여름, 김일성은 남에서 어렵게 모셔온 과학자들을 만났다. “다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의 경제가 빨리 클 수 있으려면 과학기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열심히 해봅시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저희 같은 과학자들을 배척하고 있는데 북에서는 저희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해서 많은 고민 끝에 올라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현재 북에는 일제 시기 건설된 각종 공장과 생산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작동을 못 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일제가 도망가면서 고장낸 것을 고치지 못한 것도 많고 기술자가 부족하여 어떻게 작동시켜야 할지 몰라서 운영을 못하고 있는 것도 많지요... 더보기
북극성-2형 발사의 배경과 의미[2017.2.12] 북극성-2형 발사의 배경과 의미‘선제’ 도발보다는 ‘사후’ 대응 - 강호제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올해 초, 필자는 북한의 2017년 신년사를 분석하면서 대륙간탄도로케트(ICBM)과 정지위성, 두 가지 모두 발사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과학기술을 제1순위로 배치한 배경과 북한 경제 전망 (2017.1.18 통일뉴스))당시 분석글에서 필자는 미국이 1) “핵위협, 공갈 하지말고” 2) “문전앞에서 년례적이라는 감투를 쓴 전쟁연습소동 하지 않으면”, 북한이 ICBM을 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쏠 듯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신년사가 발표된 뒤로 로동신문에는 3월 대규모, 연례적 군사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리졸브 훈련이나 독수리 훈련을 ‘문전앞'에서 계속 진행한다면 전략 무기를.. 더보기
24.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강호제 (협)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1954년 어느 날, 전쟁 시기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갔던 리종만이 귀국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리종만은 전국 각지에 10여 개의 큰 광산과 수백 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과 수백 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3:7 소작제를 시행한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을 지낸 일제 시기 대표적인 사업가 중 한 사람이다.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월북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그는 .. 더보기
6. 북한이 IT기술을 개발하는 이유 북한이 IT기술을 개발하는 이유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2012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의 3대혁명전시관에서 ‘제23차 전국 프로그람 경연 및 전시회'가 열렸다. 이 경연은 1990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최된 컴퓨터 프로그램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행사이다. 경연은 ‘조작체계, 인공지능, 과학기술 설계 및 계산분과’ 등 18개 분과로 나뉘여 진행되었고, ‘영-조, 중-조 기계번역 프로그람 경연, 콤퓨터 비루스 왁찐 프로그람경연’도 별도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모두 1,300여건의 프로그램이 출품되었다. 제1회 경연 당시 출품 건수가 440건 가량이었는데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던 1990년대 중반에는 150건까지.. 더보기
2 .준비는 과학기술 정책부터 준비는 과학기술 정책부터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제1호 전투근무태세, 정전협정 백지화, 남북 상호 불가침 조약 폐지 등과 함께 전쟁 가능성을 경고하는 북한의 성명들을 보면 모든 것을 하나에 걸고 있는 듯한 결연함, 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곳에 매몰된 사람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자기들을 자극하는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재지 않고 덤비라고 외치는 무대포 정신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진정 북한 지도부는 즉흥적으로 전쟁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전쟁에 매몰되어 모든 것을 전쟁 준비에만 올인했을까? 60여 년 북한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북한은 항상 모든 준비를 철저히 했고 전쟁의 시기에도 전쟁 이후를 위해 대비해왔던 모습을 볼 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