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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 2009년 10월호) 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 리승기 (민족21 2009년 10월호) 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 리승기 강호제 에피소드로 본 北 과학사 인물열전② 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리승기 강호제 (사)현대사연구소 상임연구원 ‘이승기’라고 하면 대부분 ‘엄친아의 대명사, 가수, 허당’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북에서 ‘리승기’라고 하면 ‘과학자의 대명사’이자 가장 유명한 과학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합성섬유 ‘나일론’에 버금가는 ‘비날론’을 발명한 사람이다. 비날론의 발명과 이를 공업화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그는 1959년 처음 제정된 ‘인민상’의 과학자 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로력영웅’ 칭호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상과 김일성훈장까지 받았다.(제1회 인민상을 리승기와 함께 받은 기.. 더보기
(민족21 2009년 9월호) 북 최초의 컴퓨터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 (민족21 2009년 9월호) 북 최초의 컴퓨터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 강호제 북 최초의 컴퓨터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 “이번에 과학원에서 만든 ‘9.11형 만능 전자계산기’는 라는 5개의 장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숫자를 입력을 하고 어떻게 계산하라고 명령을 하면 전자계산기가 알아서 스스로 계산을 순식간에 한 다음,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어떤 계산을 알아서 해준다는 이야기입니까? 뭐든지 명령하기만 하면 다 되는 건가요?”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그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맞는 프로그램이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명령이 내려지면 전자계산기는 아주 빠르게 계산을 수행합니다. 1초에 2000~2500번이나 가감승제 계산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더보기
(민족21 2009년 8월호) 과학사 인물열전 - 강영창 (민족21 2009년 8월호) 과학사 인물열전 - 강영창 강호제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사랑하.. 더보기
(민족21 2009년 7월호) 주종명 -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하자 (민족21 2009년 7월호) 주종명 -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하자 강호제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하자.” 1955년 어느 날, 김책제철소에 설치된 과학원의 임시사무실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연구사 동무, 용광로가 이상합니다. 온도가 내려가고 있어요.” “네? 그럴리가요. 같이 가봅시다.” 당시 김책제철소에는 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파견한 과학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새로운 제철공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철콕스 연구’팀을 꾸리고 코크스를 적게 쓰는 방법, 즉 100% 수입에 의존하는 코크스탄 대신 북한에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을 이용해서 강재를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강재 생산의 자립화를 위한 연구였다. 당시 연구팀 책임자는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19.. 더보기
(민족21 2009년 6월호)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민족21 2009년 6월호)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강호제 1958년 11월 5일, 김일성은 기양기계공장에서 트랙터 시제품 조립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기양기계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양기계공장(‘금성뜨락또르공장’의 전신)은 원래 간단한 농기계를 생산하던 농기계제작소였지만 협동농장들의 기계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6년부터 기계공장으로 확장하면서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노력하던 곳이다. 김일성의 전화에 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이 응답했다. 그는 희천공작기계공장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트랙터 생산 책임을 맡으면서 기양기계공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기사장 동무, 드디어 트랙터 조립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시운전은 해봤나요?” “예! 그런데 민망하게도 앞으로 가지 않고 뒤.. 더보기
(민족21 2009년 4월호)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민족21 2009년 4월호) 주체과학의 태동 : 연료의 자립. 강호제 1958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과학 연구 사업에 대한 토론 안건이 올려졌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기술지원활동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나 당 상무위원회에서 직접 과학기술 정책들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은 특별히 합성고무 연구사업에 대한 사업 보고가 계획되었다. 한 달 전에 드디어 합성고무연구가 완성되어 중간공장건설을 비롯한 사업진행을 검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난 전쟁 시기부터 합성고무 생산을 위한 연구에 깊은 관심을 돌려왔습니다. 당시 청수로 피해있던 우리 과학자들은 그곳에서부터 합성고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연구사업을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더보기
(민족21 2009년 3월호)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민족21 2009년 3월호)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강호제 “과학기술자들은 현지에 나가서 연구하라.” : 천리마운동의 질적 도약,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의 시작 오늘날 북에서 과학기술 관련 연구, 정책 등을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기관은 ‘과학원(현 국가과학원)’이다. 과학원은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다. 1958년 1월 3일 밤, 중앙역사박물관에 마련된 과학원 임시 청사의 원장실로 김일성이 불쑥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던 백남운 과학원 원장은 깜짝 놀라면서 그를 맞이하였다. “아니, 수상님께서 이 늦은 밤에...” “이 옆을 지나다가 원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잠시 들렀습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작년에.. 더보기
(민족21 200년 2월호) 천리마운동이 시작되던 날 (민족21 2009년 2월호) 천리마운동이 시작되던 날 강호제 북은 1956년에 전후복구사업을 일단락하였다. 뒤이어 경제발전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소련은 계획실행 직전인 1956년 11월에 강철재 지원 약속을 일방적으로 철회하였다. 이에 당황한 북 지도부는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연말 직전까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고 결국 중요 생산현장을 직접 찾아가 현장에서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북 지도부는 각자 찾아갈 공장, 기업소를 분담했는데 김일성 주석은 강철재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강선제강소를 맡았다. 1956년 12월 27일 김일성 주석이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천리마운동이 시작되었다. “수상님 말씀이 .. 더보기
(민족21, 2009년 1월호)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북한의 과학기술 (민족21, 2009년 1월호)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북한의 과학기술 강호제 1972년 청와대를 충격에 빠뜨린 기록영화 1972년 초, 청와대에서 비밀스러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북이 자신들의 산업발전을 기록한 영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전 국무위원, 정계 중진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영화를 보는 동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장내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을 기획하고 있던 정부 인사들은 영화 속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임자, 저걸 본 소감이 어떤가???(박정희) ??대…, 대단합니다.??(최형섭 당시 과기처 장관) "..., 대단합니다." 이 대답을 끝으로 당시 시사회는 끝났다. 당시 영화 속 장면은 이랬다. 트랙터로.. 더보기
(민족21 2011-2월호) 북 화학공업의 중심지, 함흥화학공업도시의 형성 (민족21 2011-2월호) 북 화학공업의 중심지, 함흥화학공업도시의 형성 1960년 9월 1일, 비날론공장이 건설되고 있던 함흥시에서 ‘비날론 공장 건설 관계부문 열성자 회의’가 열렸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비날론 공장 건설을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될 1961년 9월 이전에 완성하기 위한 대책모임이었다. 비날론은 리승기가 일제시기에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북에서 공업화에 성공한 합성섬유이다. 리승기가 월북할 한국전쟁시기까지는 비날론을 공업화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북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에 대규모 비날론 공장이 완공될 정도로 비날론 공업화 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비날론 공업화 연구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부터 일산 20kg(연산 80t)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