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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봉한-경락의 대발견 김봉한-경락의 대발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61년 8월 평양의과대학 교수 김봉한은 “경락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강조되던 동의학(한의학)의 과학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경락(經絡)과 경혈(經穴)은 인체에서 기(氣)가 흘러다니는 길과 중요한 자극지점과 같은 것인데 한의학, 특히 침구학의 치료법은 모두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인체의 표피에 분포되어 있는 경혈을 찾아 적당한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그 경혈이 연결되어 있는 경락을 타고 몸속 장부에 전달되어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인 기는 물론, 경혈, 경락 등이 현대과학적.. 더보기
5.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마형옥-갈섬유생산연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전후복구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54년 7월 중순, 김일성이 길주에 있는 펄프공장을 현지지도차 방문하였다. 당시 길주펄프공장에는 전쟁 시기 월북한 화학공학자 마형옥이 기술지원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형옥 선생,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수상 동지. 이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펄프공장을 정상화시키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나라를 빠른 시일 내에 강력한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일으켜 세우는 데 선생과 같은 과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 시기 북으로 올라오는 동안에는 지.. 더보기
4. 계응상-1호 박사 계응상-1호 박사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49년 초가을, 중앙잠업시험장으로 김일성이 급히 찾아왔다. 당시 중앙잠업시험장과 원산농업대학에서는 교육성 부상, 농업성 잠사국 국장 등으로 구성된 검열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검열단이 1주일 동안 ‘료해사업’을 진행한 끝에 중앙잠업시험장 장장(場長)이면서 원산농업대학 잠학부 부장인 계응상을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일성이 급히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래, 계응상 동무를 철직시킨 이유가 뭡니까?” “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번에 잠업시험장에서 개발하여 보급한 ‘국잠43’, ‘국잠47’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 누에는 생활력이 약해서 병이 돌아 수확을 하지 못한 농가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습니.. 더보기
2.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리승기-비날론 신화의 주인공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승기’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엄친아의 대명사, 가수, 허당’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북에서 ‘리승기’라고 하면 ‘과학자의 대명사’이자 가장 유명한 과학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합성섬유 ‘나일론’에 버금가는 ‘비날론’을 발명한 사람이다. 비날론의 발명과 이를 공업화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그는 1959년 처음 제정된 ‘인민상’의 과학자 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로력영웅’ 칭호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상과 김일성훈장까지 받았다.(제1회 인민상을 리승기와 함께 받은 기술부문 수상자는 주종명이다) 석유를 주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 더보기
1.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영창-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테크노크라트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김일성이 가장 신뢰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누굴까? 아마 천리마운동 시기 금속공업상을 역임하고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과학원 원장까지 했던 강영창일 것이다. 그는 1912년 경주에서 태어나 여순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일본 미쯔비시전기주식회사 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월북한 과학기술자이다. 1965년 갑자기 그가 죽은 뒤, 김일성은 공식석상에서도 자주 그를 회상했다.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 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강영창 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 더보기
북한 당대회, 볼 것 없는 잔치였나? ‘과학기술’로 미래 비전을 제시한 7차 당대회 북한 당대회, 볼 것 없는 잔치였나?‘과학기술’로 미래 비전을 제시한 7차 당대회a` 2016.05.12 강호제 (NKTech.net 큐레이터,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북한의 7차 당대회가 끝났다. 6차 당대회 개최 이후, 36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뒤 개최된 북한 최고의 이벤트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면서 지켜봤다. 하지만 그 이벤트는 지루한(?) 토론과 회의일 뿐이었고 기대하던 ‘핵포기' 혹은 ‘비핵화'나 ‘개혁', ‘개방' 등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안 나와 실망했다는 언급들만 쏟아졌다. 사실, 그런 기대를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북한은 핵 보유국임을 헌법에까지 명문화할 정도로 핵포기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또한 4차례 핵 시험 때문에 핵 물질에 대한 국제적 검증 자체가 불가.. 더보기
(민족21 2010년 12월호)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민족21 2010년 12월호)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강호제 민족21 2010-12월호 설계통일을 통한 기술혁신 : 조선식 변압기의 탄생 1960년대 초 어느 날, 대안전기공장 제관직장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혁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사로 나선 기술부의 기사장은 기술혁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이라도 불합리하거나 불편한 것을 수정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과학기술을 잘 아는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업방법에서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직접 생산을 담당한 노동자들이 잘 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과학기술 내.. 더보기
(민족21 2010년 11월호)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민족21 2010년 11월호)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강호제 민족21, 2010년 11월호 처음으로 강성대국 대문에 들어선 마을 '3월5일청년광산' 1954년 어느 날, 전쟁 시기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갔던 리종만이 귀국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리종만은 전국 각지에 10여 개의 큰 광산과 수백 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와 수백 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3:7 소작제를 시행한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을 지낸 일제 시기 대표적인 사업가 중 한 사람이다.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 더보기
(민족21 2010년 10월호)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민족21 2010년 10월호)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강호제 민족21, 2010년 9월호 과학기술의 독자노선 시작은 1952년부터 1952년 12월 29일, 과학원 임시청사 회의실에서 2회 과학원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과학원은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지만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직 변경에 대한 중요한 안건이 생겨 급히 소집된 회의였다. 과학원 초대원장은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직책이 높았던 홍명희가 맡고 있었다. “오늘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8개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추가로 ‘공학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긴급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자연과학 분.. 더보기
(민족21 2010년 9월호)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민족21 2010년 9월호)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강호제 민족21, 2010년 9월호 북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 과학원 설립 1952년 4월 27일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 약 400여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자 대회가 3일에 걸쳐 개최되었던 것이다. 개막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동무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파괴, 낙후되었습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전후복구사업과 함께 경제건설사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업화 수준을 높여 빠른 시일 내에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기.. 더보기